새로운 시대를 창조적으로 열어가는 배 경락 목사입니다
오늘은 초대교회 교부들이 교회론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갈등이 있었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초대교회는 엄격주의와 관용주의가 서로 싸웠는데 그 싸움이 현재 한국교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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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사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1세기도 가기 전 교회라 불렸던 지역 회중은 광범위하게 흩어졌습니다.
1세기 초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108)는 머리와 연결된 몸과 같이 사방에 흩어진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소위 보편 교회론입니다.
하나님은 사방으로부터 성도들을 불러 모아 보편 교회를 세우셨고, 땅끝까지 뻗어 나갈 것을 기대하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자연스러운 결과이지만 각지에 세워진 교회는 언어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성격이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름을 뛰어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였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라고 믿었습니다. (엡4:4-5)
초대교회는 다름을 수용하는 하나 된 보편 교회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00여 년이 지나면서 분리주의, 엄격주의 교회론이 등장하였습니다.
그 선구자는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6)였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태어난 그리스인으로서 로마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박식하고 도덕성이 뛰어났으며 웅변까지 잘하였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는 이단이나 죄인들이 들어설 여지가 없으며, 교회는 죄에 빠져 타락한 자들을 배제한 지상의 에덴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엄격한 교회를 주장하며 분리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도덕성이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용납하지 않는 엄격함을 보였기에 그들의 교회론을 엄격주의 교회론이라고 합니다.
엄격주의 교회론을 주장한 사람으로 아프리카의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 c.160-225)이 있습니다.
그가 몬타누스 이단에 빠지면서 엄격주의를 주장했는데, 교회란 영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순결하고 흠도없고 티도 없는 공동체라고 여겼습니다.
히폴리투스나 터툴리안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교회를 주장하면서 조금이라도 죄 된 모습을 보이면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거룩한 교회와 속된 교회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 세상에 완벽하게 거룩한 교회가 존재하긴 하는 걸까요?
이들은 초대교인들이 세상에 들어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구원하려 자기 목숨을 바친 아름다운 전통을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세상뿐만 아니라 한 몸 된 교회를 비판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엄격한 보수주의, 근본주의 교회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만 의롭고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 다른 교회는 다 틀렸다고 주장하는 독선적 교회가 등장하였습니다.
엄격주의 교회론은 계속 발전합니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키프리안(Cyprianus, 200?-258)도 엄격주의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빼어난 학식과 뜨거운 열정을 가졌으며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 박해 때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참다운 교회는 가톨릭 교회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교회 안(in ecclesia)과 교회 밖(extra ecclesia)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교회 바깥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학은 도 아니면 모,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흑백 논리를 펼쳤습니다.
그는 교회 바깥에 있는 무리로 유대인,이방인, 이단자, 불신자, 배교자 등이었습니다.
그는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Salus extra ecclesiam non est)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통로이며 전달자이기에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어머니 교회를 거쳐야 하며, 어머니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 파 역시 엄격주의 교회론을 유지했습니다.
도나투스파는 자신들은 거룩하고 순결한 순교자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물론 로마의 압제에서 많은 사람이 순교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순교의 피를 앞세워 배교자들, 타협자들, 불신자들을 정죄하였습니다.
엄격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흑백논리, 이원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이해했으며, 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박멸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마치 조지 부시가 이란과 이라크를 공격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로 삼았던 ‘악의 축’과 같은 논리입니다.
이들은 세상을 사랑하거나, 세상을 섬기거나,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주님의 정신은 상상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자기들 앞에 나와 무릎 꿇고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엄격주의에 대항하여 관용적인 태도, 혹은 포용적인 태도로 교회론을 전개하던 교부들도 있었습니다.
130~140년 경 저술된 헤르마스의 목자(Pastor Hermae)를 보면 세례받은 후에 저지른 중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엄격주의에서는 용서의 가능성조차도 닫아버린 것과는 다른 태도입니다.
노예출신으로 로마의 주교가 된 칼리스투스(Callistus, ?~222)는 밀과 가라지 비유를 들어서 교회 안에는 죄인과 거룩한 사람이 더불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엄격주의자들과 달리 신분이 다른 귀부인과 노예의 결혼을 인정해 주례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아프리카 누미디아의 주교 옵타투스(Optatus, ?- 397)는 칼리스투스의 밀과 가라지 비유 해석을 받아들여 거룩하고 죄스러운 교회를 주장하였습니다.
옵타투스는 도나투스파를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에 비유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긴 것은 교회의 거룩하면서도 죄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온건한 도나투스파였던 티코니우스(Tichonius, ?-390)는 교회란 절반은 죄스럽고 절반은 거룩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나누어진 몸”(corpus bipartitum)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us, 354-430)은 나누어진 몸이란 표현보다 뒤섞인 몸(corpus permixtum)이란 표현을 선호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참된 교회는 마지막 타작이 끝난 다음에야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세례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을 훤히 내다보시는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예지의 눈으로 보면, 교회 바깥에 있는 듯이 보이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있고, 교회 안에 있는 듯이 보이지만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도 있다.”
그는 요한 서신 강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없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어떻게 자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대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만 가졌지, 그 행동은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름에 어울리는 행동을 한다면, 누가 그대를 이교도라 부른다 할지라도, 그대는 행동으로써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대가 행동으로써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모두가 그대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 준다 한들 그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름만 있지 실상이 없는데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옵타투스가 주장했던 거룩하고 죄스러운 교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지루한 교회론 논쟁은 어거스틴에 의해 결론을 짓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초대교회가 주장했던 수많은 다름을 인정하면서 통일성을 주장하던 관용적인 보편 교회론을 정립하였습니다.
엄격주의를 주장하던 무리는 모두 이단으로 정죄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엄격주의와 관용주의는 계속해서 싸움합니다.
특별히 교회가 부패할 때마다 엄격주의가 등장합니다.
썩은 것들은 모두 도려내자.
우리 말고 다른 놈들은 다 썩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사람도 죄인임에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모두 죄 많은 교회입니다.
또 교회가 권위와 힘을 가질 때 엄격주의가 등장합니다.
자기와 다름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데 아주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가톨릭이 종교재판, 마녀사냥,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을 박해할 때 가져온 이론적 근거가 엄격주의였습니다.
자신들이 한없이 부패하고 죄많은 교회이면서도, 힘과 권위로 자신의 추한 모습을 숨기고, 다름을 가차 없이 핍박하였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엄격주의 교회론자 키프리안이 말했던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Salus extra ecclesiam non est)는 명제를 입버릇처럼 되뇌었습니다.
자기들이 이단이라 정죄해놓고서 그 이론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현재 한국의 보수주의 기독교도 비슷한 태도로 엄격주의를 주장합니다.
넌 이래서 안 되고, 넌 저래서 안 되고, 우리 말고 다 틀렸다는 식으로 억지를 부립니다.
전 세계 기독교 중에 1%밖에 안 되는 한국 장로교의 독선적 모습은 중세 로마 가톨릭과 비슷합니다.
자신의 부패함과 추함은 다 숨기고 남을 비판하는 데 목소리를 높이는 엄격주의를 따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회론 분쟁이 종교 개혁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ucEVJYaO_E&t=10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