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은 옵타투스가 주장했던 거룩하고 죄짓는 교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아주 작은 차이 같지만, 이것이 나중에 큰 차이를 만듭니다.
거룩하고 죄짓는 교회는 늘 긴장해야 합니다.
섰다고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거룩하다 생각하지만, 한순간에 넘어지는 것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지만, 동시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장차 주님을 볼 날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까지 완벽한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바울도 ‘자신이 쓰임 받다가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였습니다.
거룩하고 죄짓는 교회론은 늘 긴장하며 자신을 돌이켜 보라는 경고와 같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권력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손에서 떠나는 순간 인간은 절대 부패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눈에 보이는 죄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것들을 성토하고 손가락질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위협은 영적인 죄입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죄는 악하지만 다른 죄에 비하면 가장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쾌락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전적으로 영적인 쾌락입니다.
즉 잘못을 남에게 미루고 즐거워하는 것, 남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거나 선심 쓰는 척하면서 남의 흥을 깨뜨려 놓고 좋아하는 것, 험담을 즐기는 것, 권력을 즐기는 것, 증오를 즐기는 것이야말로 악한 죄입니다.
제 안에는 제가 정말 추구해야 할 인간적 자아와 싸우는 두 가지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동물적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악마적 자아입니다.
둘 중에 더 나쁜 것은 악마적 자아입니다.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냉정하고 독선적인 도덕가가 거리의 매춘부보다 훨씬 더 지옥에 가까울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정말 싸워야 할 죄는 바깥의 죄, 사회의 죄, 불신자들이 저지르는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저지르는 죄, 교회가 저지르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나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자신이 죄짓는 존재란 사실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교회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론은 어떤 위험이 있을까요?
그건 긴장의 끈을 놓으려는 위험이 있습니다.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톨릭 교회에서 정죄받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에 속해 있다는 확신을 가지길 소망했습니다.
어쩌면 그건 자연스러운 반응일지 모릅니다.
가톨릭이 이단이라 종교재판 하고 화형시켜 죽일 때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필요했고, 참된 교회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이 필요했습니다.
칼빈은 만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음을 교리화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론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칼빈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성원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서 종교개혁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줄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는 기독교 강요 4권 1장 8절에서 교회의 회원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하면서 세가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1. 믿음의 고백
2. 삶의 모범,
3. 성례에 참여
이 세가지를 통해서 참된 교회의 회원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세 가지를 하면 참된 교회의 일원이 되고, 구원의 확신을 가져도 되는 걸까요?
순교 상황에서 세워진 구원의 확신과 예정론과 교회 회원 자격에 대한 이론이 순교 상황이 사라졌을 때 어떻게 변하였을까요?
위기 상황에서 담대히 생명을 내걸고 신앙을 지키게 했던 교리들이 편안하고 안전한 상황으로 바뀌자, 자랑거리나 남을 판단하는 교리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구원의 확신 교리는 천국가는 티켓을 확보하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구원받았지만 언제든 죄지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늘 조심하고 자신을 돌아보라고 가르쳤던 초대교회의 강조점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천국행 티켓만 확보하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간단한 교리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위안을 주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가르침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었습니다.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짓고 사회에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교회도 죄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부정과 부패와 온갖 죄악들이 교회 안으로 스며들어왔습니다.
사회의 법과 규칙을 무시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꿩잡는 게 매란 말이 있듯이, 교회는 오직 자기 몸집 불리기에만 열을 올렸습니다.
물질주의, 성과주의, 성공 지상주의 등 세속의 사상이 교회 안에 깊이 자리하면서, 교회의 죄짓는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사회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때 등장하는 이론이 눈에 보이는 교회는 부패할 수 밖에 없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는 거룩하다는 이론입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죄를 지을 때 ‘그건 눈에 보이는 교회의 문제이지, 눈에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에 속한 우리는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참된 교회에 속하지 않은 저 사람들 때문에 피해 본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자신은 참된 교회의 일원인양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엔 긴장도 없고, 회개도 없습니다.
오직 확신에 따른 안심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확신은 착각이요, 자만이요, 태만입니다.
문제 있는 교회와 교인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그런 사람과 관계없는 참된 교회 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회나 목사가 문제를 일으키면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자신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의 죄된 문제는 언제나 남의 문제가 됩니다.
이건 남에게 손가락질 하는 바리새인들의 습관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가 요리조리 문제를 외면하면서 남에게 손가락질만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교회론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성례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교회의 일원이 되긴 하지만, 이 둘 다 살아계신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참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칼빈이 말한 것처럼 어떤 조건을 충족시킬 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늘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여야 합니다.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넘어질 수 있고, 교회도 넘어질 수 있고, 죄지을 수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마지막 타작이 끝난 다음에야 온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변변치 않지 않은 구원의 확신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요.
참된 교회의 일원이라고 자만심을 가져도 안됩니다.
사도 요한은 에베소 교회에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계2:5)
교회는 항상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말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판단과 심판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하실 일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함으로써 나는 안 그런척하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영적 죄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의 죄, 다른 교회의 죄가 보이면, 그것은 곧 나의 죄, 우리의 죄입니다.
이제 초대교회에서 외쳤던 거룩하지만 죄짓는 교회론을 회복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거룩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 거룩한 교회로 온전히 서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이름은 있지만, 여전히 죄를 짓는 교회가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을 쳐서 경계해야 하며, 죄짓는 모습이 드러나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머리숙여 회개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회개할 거리가 차고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