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Nov 22. 2020

진정한 변화를 원하십니까?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후회는 동물과 달리 사람만이 가지는 능력입니다.

후회는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게 합니다.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으로만 멈춘다면 아무런 발전이 없겠지요.

후회를 통해서 보다 나은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고,

실패한 만큼 성장하고 더 배운다는 말도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수많은 실패를 통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 중에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 같은 사람입니다.

몽테뉴는 자신이 과거에 한 일 중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잘못된 행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건 과거일 뿐이기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보통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보고 수정하는 일을 하기 마련입니다.

몽테뉴는 자기 글을 절대 수정하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글에 현재 생각하는 점을 자꾸만 덧붙여 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쓴 책이 그 유명한 몽테뉴의 수상록입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덧글을 써서 개정 증보판을 만들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몽테뉴의 수상록은 결말에 도달했기 때문에 글쓰기를 멈춘 것이 아니라 생애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멈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몽테뉴의 자세도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과거의 잘못은 지나갔기에 고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를 묻어 버리고 새로움을 추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제가 몽테뉴의 자세에 대해서 이해는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학계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

지나간 과거를 반성하고 다시금 새로움으로 출발하려는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인간은 미련하게도 실수와 잘못과 죄악들을 자꾸만 반복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몽테뉴를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라고 권면하십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돌이켜 보고, 앞으로 삶의 방향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를 생각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을 돌이켜 보고 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8-10)


자신을 돌이켜 본다는 말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 믿기 전의 삶과 예수 믿은 후의 삶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삶의 변화를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


그는 자기의 힘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의 결심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변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고 끝까지 밀고 나갔을 것입니다.

마치 몽테뉴처럼 자신에 대하여 당당함을 유지하였을 것입니다.


인간은 후회하는 존재라고 하지만, 실제로 참된 후회와 반성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참된 후회와 반성을 통해서 보다 나은 사람으로 바뀌는 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태도의 변화, 삶의 변화, 생각의 변화는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변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건 내가 변하고 싶다고 해서 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의 변화, 삶의 변화, 태도의 변화를 통해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도 명성을 얻고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부럽기도 하지요.

그러나 영적인 변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현재 이곳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변화를 이룬 사람은 이 세상 너머를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을 전체적인 안목으로 보지요.

건축에서는 이것을 조감도라고 하지요.

위에서 건물을 내려다보면 아 이 건물이 이런 모양이구나 하고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영적인 변화를 이룬 사람은 눈이 뜨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를 보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변화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느끼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아시지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그리스 로마의 수백 년 지배 아래서 경제는 완전히 망가지고, 사람들은 할 일이 없어서 손가락을 빨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이야기하셨습니다.

큰 포도원 주인이 아침에 인력시장에 나가서 사람을 찾습니다.

큰 포도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적 상황을 보면, 반드시 그 집에 부리는 종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종들이 없이 혼자서 포도원을 경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종들과 함께 얼마든지 포도원의 포도를 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집에서 부리는 종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지만, 밖에 수많은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은혜를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력 시장에 나갔습니다.

아침부터 “누가 나를 써주는 사람이 없을까?” 하면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쭈그려 앉아 있는 힘없는 사람들을 하나 둘 불러 모았습니다.

우리 집 포도원에서 일하실래요?

그냥 돈을 주면 “거지 취급하느냐?” 하면서 자존심 상할까봐 일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존심도 세워주고, 도움도 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온종일 해가 질 때까지 수시로 인력 시장에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아마도 동네 사람 대부분이 그 포도원 주인의 도움으로 먹고살았는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어디서 발생합니까?

품삯을 계산할 때입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저녁에 와서 일한 사람이나 품삯을 똑같이 하루 치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때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이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불공평합니다.

그가 불공평하게 생각한 이유는 잘 알고 있습니다.

노동 가치의 불공평하게 평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그를 부른 것은 그의 노동력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대단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능력, 그의 실력, 그의 학력, 그의 명성, 그의 모든 것은 사실상 필요 없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밭을 수확하는 데 그의 도움은 사실상 필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부른 것은 딱 한 가지 이유입니다.

은혜입니다.


굶고 사는 것이 불쌍해서, 그냥 두면 죽을 것이니까? 그에게 딸린 굶주린 식구들이 있으니까

값없는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가 포도원 주인이 베푼 은혜를 잊어버리자 냉혹한 계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 가치를 계산하고, 자기 가치를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부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구원하셨을까요?

그건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그건 우리가 능력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 도움은커녕 작은 도움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칠 때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도와준다고 하다가 오히려 망칠 때가 많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잘나서 된 줄 알고, 자기가 능력이 있어서 쓰임 받는 줄 착각한다면 이건 정말 착각을 넘어 오만불손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의 첫 번째 징후가 무엇입니까?

나의 나 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전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나다운 모습이 되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음입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변화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나의 나됨을 잃어버린다면 세상적으로 여러분이 아무리 성공해도 결코 성공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아무리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오만불손한 착각 속에 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나됨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발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 때 비로소 낮아지고 낮아져 참된 겸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참된 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 때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cwHUKapmBA

작가의 이전글 다윗 왕권 이전의 신앙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