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은혜가 싫어요.”
여러분은 은혜를 좋아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은혜를 싫어할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 그리스도인 중에 은혜를 싫어하는 사람이 제법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은혜를 싫어할까요?
내가 받는 은혜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이 은혜를 받는 것을 싫어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둘이 같은 일을 했는데 은혜의 크기가 다르면 싫어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게다가 둘이 같은 일을 했지만, 자신이 남보다 배나 더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이 더 큰 은혜를 받으면, 그러한 은혜에 대해서 싫어할 가능성은 매우 커집니다.
오늘 읽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나오는 일꾼들이 바로 그러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저녁 늦게 와서 일한 사람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받았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한 사람이 불공평한 삯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 정당한 품삯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화를 내었습니다.
왜요?
남들보다 더 일했는데, 남들보다 더 수고했는데 은혜의 크기가 다르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싫다고 소리치는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
둘은 같은 신학교를 다니면서 우정을 쌓았습니다.
한 사람은 모범생으로 열심히 공부하였고, 성적도 좋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소위 껄렁껄렁한 학생이었습니다.
공부도 잘 안하고, 시험 때만 되면 친구의 노트를 빌려서 벼락치기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도 모범생 친구는 한번도 싫다 하지 않고 자기 노트를 빌려 주었습니다.
친구니까요? 절친이니까요?
두 사람은 똑같이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모범생은 그의 성격대로 신실하게 사역을 했습니다.
껄렁한 친구는 그의 성격대로 대충 대충 사역을 했습니다.
세상의 이치대로라면 모범생 목회자가 훨씬 더 큰 열매를 거두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껄렁껄렁한 목회자가 훨씬 더 큰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모범생 목회자 교회는 50명도 안되는 교회에서 매일같이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며 목회를 합니다.
교인들은 날마다 속을 썩이는데 힘들어 딱 죽을 것 같습니다.
껄렁한 목회자는 500명이 넘는 교회를 하면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친구 목사들을 불러서 점심을 사주기도 하고, 약한 교회를 후원하기도 합니다.
비교하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개척교회를 하는 모범생 목회자는 속이 상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하시면서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건 비단 목회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고민을 합니다.
특별히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뻥뻥 터지고, 되는 일은 없고, 고난이 날마다 다가올 때 속으로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의 포도원 주인을 보면 좀 괴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포도원 주인이 만약 현명한 사람이라면 자기 포도원에 필요한 일꾼이 몇명이면 일을 마칠지 알 것입니다.
제가 주인이라면 포도원의 규모로 볼 때 20명이면 될 것 같다 판단이 설 것이고, 아침에 나가서 20명을 구하면, 일꾼들 중에 불평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인에게 크게 감사할 것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을 고용해 주는 주인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저녁 때까지 시간만 되면 나가서 일꾼을 불러옵니다.
결과적으로 포도원에 일하는 일꾼들의 노동 시간이 전부 다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임금을 지불할 때 참 괴상 망칙한 방식, 문제를 일으킬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저 같으면 이렇게 할 것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을 먼저 불러서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아마도 그들은 머리 숙여 감사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시간부터 일한 사람을 불러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아마도 그는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 받은 임금을 보았을 테니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일찍온 사람부터 늦게 온 사람에게 임금을 주었다면, 포도원에서 일한 모든 사람이 기뻐하고 감사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임금 지불 방식을 거꾸로 했습니다.
제일 늦게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아침 일찍 온 사람에게 임금을 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침 일찍 온 사람의 기대감만 크게 만들었다가 큰 실망을 갖게 하고 급기야 불만을 터트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건 포도원 주인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설마 그런 포도원 주인이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멍청한 포도원 주인도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런 방식으로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포도원 일꾼들의 사고방식과 포도원 주인, 곧 하나님의 사고 방식의 차이점을 극대화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일꾼들의 사고방식은 무엇일까요?
그건 “일”입니다.
포도원에서 얼마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느냐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일로서 평가받고 싶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세상의 사고방식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모든 사람을 그의 능력, 그의 실력, 그의 성과, 그가 행한 일의 결과로 평가합니다.
하다못해 일을 이루기까지의 과정, 비록 좋은 열매는 거두지 못했지만, 성실하게 일했다면, 최선을 다했다면, 평가를 해줍니다.
그게 세상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평가입니다.
이러한 일 중심의 사고방식이 가져오는 병폐가 있습니다.
첫째가 비교입니다.
제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두 목회자의 사역을 교회의 사이즈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비교는 자연스럽게 누가 위에 있고 아래에 있는 지를 판가름합니다.
위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겸손하려고 노력해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에게 힘이 주어지고, 자리가 주어지면,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중심으로 일이 이루어집니다.
반면에 성과를 거두지 못한 사람은 기가 죽어 움츠러들기 마련입니다.
니체는 권력에의 욕망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세상은 바로 이런 욕망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했으면, 남을 도와주었으면, 언제나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서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고, 고마워하는 태도를 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한 자들은 압니다.
자기가 감사를 표현하고 고맙다고 하는 것은 곧 그의 수하에 들어가는 것이고, 나중에도 그의 도움을 또 받고 싶다는 뜻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약한 자들 중에 자아가 강한 사람은 감사하다는 말을 하기 싫어 도움을 거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때문에 남을 도와줄지언정 도움받기를 싫어합니다.
머리가 되어서 사랑과 은혜와 도움과 돌봄을 베풀어 주기를 원합니다.
결코 꼬리가 되어서 머리를 숙이고 “감사합니다”말하면서 손벌리기 싫어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게 바로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고방식은 무엇입니까?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은 애초부터 포도원의 수확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신경 쓰시는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일거리를 찾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고달픈 삶을 보셨습니다.
그를 기다리는 가족 식구들을 보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포도원 수확 때문에 부른 것이 아니라 그들 사람 자체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건 일에 따른 결과로 베푸는 은혜가 아니라, 그저 사람에게 베푸는 은혜이기에 공평하게 베풉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 일은 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분들이 항상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사역”, “일”에 포커스를 맞추는 버릇이 있습니다.
사람을 헤아리고, 사람의 마음을 만져주고, 사람을 존중해주고,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자꾸만 일의 성과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사람을 이야기할 때도 “몇 명 모였느냐, 몇 명 전도했느냐, 몇 명 도와주었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도 자꾸 숫자로 바꾸어 버립니다.
사람을 숫자로 바꿀 때 사람의 인격은 사라지고, 마틴 부버가 말했듯이 하나의 개체인 그것으로 바뀌어집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목회는 성과를 얻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일입니다.
출석 교인이 많으면 분명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보았자 얼마나 큰 일일까요?
사회를 변혁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큰 일은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수천 수만 명 교인이 모이는 교회라 할지라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하십니다.
몇 백억 헌금을 하고, 선한 일을 할 수 있지만, 그건 세상이 볼 때 커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개척교회를 하면서 한 명에게 집중하여 그와 마음을 통하고, 그 앞에 기꺼이 머리 숙여 경청하고, 그와 진심을 나눈다면 그는 수만명 교회에서 큰 사역을 하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역을 한 것입니다.
일, 성과, 열매, 결과, 사역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작은 일이라 실망하지 맙시다.
작은 열매라 실망하지 맙시다.
오늘 비유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세상에 단 한 사람만 있다 해도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십자가를 지게 하셨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전도 계획 때문도 아니고, 거대한 교회를 지었기 때문도 아니고, 화려한 성가대와 주차장과 편의시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에게 집중하였습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그 사람에게 집중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가갔습니다.
그게 바로 초대교회의 성공의 비결입니다.
오늘 대한민국 교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IaYHFoGLqY&t=601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