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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10. 2020

탕자의 형을 위한 변명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크리스챤이 아니어도 한 번쯤 들어보았을 만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탕자의 형은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집안의 숨어 있는 탕자라고 해서 어떤 분은 “집탕”이라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탕자는 바로 큰아들이었다고 지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큰아들은 둘째가 돌아왔을 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송아지를 잡아서 반겨 맞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불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 즉,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을 통해서 자신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분이고 하나님 아버지는 바로 그것을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 비유를 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을 비판하고 수군거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비유에 등장하는 큰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은연중에 지칭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큰아들로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을 새롭게 해석하여 보고 싶습니다.

이건 순전히 제가 큰아들로 자라면서 겪은 개인적인 경험으로 해석한 것이기에 오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판하셔도 제가 굳이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큰아들로 태어난 것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 아버지는 첫 번째 아이가 사내아이로 태어난 것을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아들의 탯줄을 아버지가 이로 끊으면 장수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으셨는지 제 탯줄을 몸소 자신의 입으로 자르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무척이나 사랑하셨습니다.

제가 모범적으로 자라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목사가 되어도 자기보다 천배 만배 훌륭한 목사가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기대와 소망이 컸던 만큼 제가 받은 사랑도 컸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요셉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요셉이란 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지금도 외가에 가면 모두 저를 요셉이라고 부른답니다.


기대와 사랑이 큰 만큼 아버지는 저에게 엄격하셨습니다.

밑에 여동생 둘과 남동생 하나가 있었지만, 그들과 저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랐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아버지는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속으로는 어떤 마음인지 몰라도 언제나 저에게 더 열심히 하라고 채찍질하였습니다.

주마가편이라고 달리는 말에는 채찍을 가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엄격한 규칙 가운데 자라는 동안 동생들은 자유의 향기를 맡으며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제일 밑에 남동생은 사고뭉치였습니다.

학교를 빠지기도 일수였고, 안 좋은 친구들과 놀러도 다니고, 가출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막내를 감싸고 도셨습니다.

막내는 아버지의 은혜로운 처사에 늘 용서를 받았지만, 맏아들인 저는 아버지의 엄격한 율법의 잣대에 매를 맞았습니다.

12년 개근상을 받을 정도로 모범적이고 착실하였던 (ㅎ 제 자랑인가요) 저는 아버지의 눈에 언제나 미달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고모 집에 놀러 갔다가 한 번만 자고 가고 싶어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허락받아달라고 고모에게 부탁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밤중에 달려와서 저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셨습니다.

지금도 그때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허구헌 날 친구 집에 가서 자고 오던 막냇동생이 그렇게 부러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막내는 사고를 쳐도 언제나 은혜와 사랑과 용서를 받았고, 저는 착한 일을 해도, 공부를 잘해도 칭찬과 격려를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동생은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을 들어가서 1년 다니다 그것도 적성에 안 맞는다고 그만두었습니다.

그래도 그에겐 언제나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탕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지요.

제가 탕자 비유를 보면서 큰아들은 참 모범적이고 아버지의 말을 어김이 없이 잘 순종하였습니다.

반면에 동생은 언제나 사고뭉치였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고 말했다는 것부터 동생이 얼마나 막돼먹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썼다는 데서 그의 생활 태도, 마음가짐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동생에 대해선 언제나 은혜와 사랑과 용서를 베풀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의 사랑도 알았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죽을 죄를 지어도 아버지는 자기를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돈을 땡전 한 푼 없이 창기와 함께 다 날려버리고도 뻔뻔스럽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제가 그랬다면, 저는 죽으면 죽었지 돌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도 아마 저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큰아들이 알고 있는 아버지는 도덕과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분이고, 아버지의 명을 어김없이 다 순종하여도 송아지 한번 잡아서 우리 큰아들이 이렇게 ‘멋져요, 훌륭해요’ 칭찬하지 않는 냉정한 분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동생이 돌아와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다시 용서를 받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큰아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명이라면 단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차별이요,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생이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룰루랄라 떠날 때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예측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된 것입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생일대 딱 한 번 아버지에게 대들었습니다.


여러분 큰아들이 잘못한 건가요?

큰아들이 정말 집안의 탕자 맞나요?

집탕이라고요. 그래요 집탕이라고 해도 좋고, 잡탕이라 해도 좋고, 모진 놈이라고 해도 좋아요.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은 꼭 한 번은 해야겠어요.

억울해서 못살겠어요.

여러분 큰아들이 집을 떠났을까요?

큰아들이 아버지를 떠났을까요?

여러분이 어떤 추측을 해도 다 좋습니다. 그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생각일 테니 일리 있겠지요.


그러면 큰아들인 저의 생각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제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정말 끔찍이도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언제나 제가 있었습니다.

“애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을 저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가 은퇴하고서 기력이 다 쇠하여졌을 때 비로소 저에게 진심 어린 칭찬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말은 그때 했지만, 돌이켜 보면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를 향한 사랑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선물을 사도 큰 아들 것을 제일 먼저, 제일 좋은 것, 제일 큰 거로 해주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스미스 코로나라는 타자기와 캐논 카메라를 선물로 사주셨습니다.

1978년도에 그런 선물을 받은 사람은 우리 학교에 저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아버지의 사랑을 수없이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말이 아니라 선물로 칭찬하고 격려하고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선물보다 말로서 사랑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게리 채프만의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아버지와 저는 사랑의 언어가 달랐습니다.

그 언어가 소통한 것은 아버지가 기력이 쇠한 후, 선물할 능력도 사라진 후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드디어 말로서 사랑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정말 저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의 사랑하는 마음을 요즘 매일 같이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 그때는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그 모든 시간은 마치 가시나무로 둘러싸인 보물 함처럼 겉은 상처로 가득하지만, 그 안을 열어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 없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은혜가 차고 차고 차고 넘쳐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도 저와 같이 아버지의 진정한 마음을 알았으리라 생각합니다.

https://youtu.be/j1Olgymmsi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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