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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20. 2020

요한복음과 선교

선교는 성경의 중심 주제입니다.

이 말은 다르게 말하면 선교는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라는 말입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거대한 역사를 진행해 가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선교적으로 읽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선교학자들 이외에는 거의 성경의 선교적 관점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신학계에서 선교학은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컬럼비아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윌리암 랄킨과 고든 콘웰의 구약학 교수인 월터 카이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가 성경을 선교적으로 읽어보자는 의미로 각자가 성경 한 권씩 선택하여 선교적으로 읽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책이 성경의 선교신학이란 책입니다.

그 중에 마틴 어드만 박사는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에 나타난 선교”를 썼는데 제가 오늘 바로 그 부분을 요약 강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복음서를 쓰는 이유를 요한복음 20장 31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여기에서 “믿게 하려 함이요”라는 말은 명백히 선교적입니다.

요한은 선교 사명을 마음에 두고 복음서를 기록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 열심히 선교했던 바울 사도나 베드로 사도도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선교 사명을 감당하였던 처음 제자들 사도들은 전 세계로 흩어져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제 다 죽고 요한만 남았습니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예수님을 직접 맞대면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은 마지막 주자로서 선교에 대한 강렬한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예수님, 베드로, 바울, 사도들과 복음에 헌신했던 신실한 자들이 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열심히 선교했는데 그 불길이 계속 이어가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요한이 강조한 선교 접근법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개념입니다.

요한은 “나를 보내신 자”이신 아버지의 명령을 통하여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합니다.

이 주제는 요한복음에서 대략 40번 정도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종려 주일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백성은 노래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12:13)

여기 오신다는 표현은 15절에서도 다시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시려고 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세상에) 주셨습니다.

여기 “주셨다”는 말은 곧 선교적 용어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오천 명을 먹이신 후 그 표적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주님은 다시금 이 “주심, 줌”에 대한 말로 선교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2,33)


요한이 선교를 설명하는 동사로서 “보냄, 오심, 주심”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선교의 파송자, 주체자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선교적 과업과 메시지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말할 것과 이룰 사명을 친히 명령하여 주신 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요12:49)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선교사로 이 땅에 파송 받은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교적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요한은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께서 “내 사역을 다 이루었다”(요19:30)고 선언하신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러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침 뱉고, 모욕하고, 대적하고, 심지어 죽일 줄 다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생명을 주고, 하나님의 빛과 진리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선교 사명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는 선교적 사명을 이루는 최고의 정점입니다.

우리는 선교하다가 거절과 반대와 모욕과 침 뱉음과 대적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합니까?

번개의 아들이라 불렸던 요한처럼 하나님 저 마을을 저주하여 싹 망하게 하십시요! 외치는 것 아닙니까?

불신 지옥! 큰 소리로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 안 믿는 저 썩을 놈의 세상은 망해라!

안티 크리스천들, 동성애자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라 하지 않습니까?

세상을 적대시하고, 세상을 향하여 데모하고, 세상을 미워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기독교는 너무 전투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에 어떤 이슈가 나오면 기독교가 제일 전면에 나서서 싸움을 이끌어가는 모습은 정말 하나님의 선교를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아니 하나님의 선교를 일부러 외면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선교보다는 승리를 더 갈망하고, 뱀의 머리를 짓밟아 짓뭉개서 이겨야 하겠다는 잔인한 승부욕이 작동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뱀의 머리를 짓밟아 이기는 성경적 모습은 십자가입니다.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죽는 자리입니다.

힘이 없어 죽는 게 아니고 그들을 사랑하여서, 그들을 구원하려고 기꺼이 죽음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성경적 승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면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완수하는 자리이고 동시에 하나님께 최대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에 그 의미는 언제나 선교적 사명을 이룰 때 사용하셨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기독교가 대한민국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다시금 회복하여 세상을 사랑하여 기꺼이 희생하고 죽는 자리까지 갔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십자군 전쟁에서 쳐들었던 십자가 깃발이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적들을 모두 짓밟아 죽여버리고 기독교의 힘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보여주자는 사단적 방법을 성경적이라 왜곡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순수한 십자가 정신을 다시 회복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기독교는 희망이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평화하고, 이해하고, 섬기고, 돌보는 기독교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교는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날 수 없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DCn9WUHvrw&t=1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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