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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26. 2020

질병과 재난은 우리의 죄 때문일까요?

요즘 우리는 Covdi-19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일부 목회자는 이것이 우리의 죄 값이라고 말합니다.

Covid-19같은 재난 상황은 세계가 당하는 고통이라면, 질병은 한 개인이 겪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아픔과 고통을 당할 때마다, 그것을 죄의 결과라고 단정 지어 말해도 될까요?

오늘 이 점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질병과 재난이 죄 값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부는 맞을 수 있지만, 일부는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사람이 병들고 죽는 것은 죄 값이라고 말합니다. 

고난, 재앙, 죽음이 다 첫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저는 여기서 ‘성서와 의학’이란 책을 쓰신 스위스의 의사 폴 토우르니에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그는 성경을 읽을 때 개인주의적(individualistic)이 아니라 개인적(personal)으로 읽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성경을 개인주의적으로 읽는 다는 것은 인간의 상호의존과 연대감,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개개의 인격을 가진 인격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 읽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어떤 사건을 너무나 쉽게 일반화하는 잘못된 읽기입니다.

성경의 사건마다 등장인물의 상황과 형편이 다르고, 관계와 믿음의 수준이 다른데,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면 그건 잘못입니다.


죄는 우리를 절망(사망)으로 인도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에게로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죄의 깨달음이 없다면 은혜를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도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때로 어떤 사람의 질병이 죄와 연관관계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를테면 중풍병자를  치유하기 전에 먼저 죄 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후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질병과 재난과 어려움을 보면서 죄 때문에 심판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실을 알 능력이 없으며, 또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는 자격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다 죄인입니다.


폴 토우르니는 죄와 질병의 관계를 악마적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바리새파적인 정신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용서와 치유와 은혜를 베풀 수는 있지만 정죄하거나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일부 믿음주의자들은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병들고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요.

물론 그건 맞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병들고 고통받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죄 때문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시편 저자는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자신이 고통받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그러므로 죄와 질병의  인과관계를 가지고 주장하면서 남을 정죄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폴 토우르니에는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질병은 자기가 죄를 저지른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의 수없이 많은 고통과 가책을 받고 절망합니다. 의학은 처음부터 이러한 종류의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을 자유롭게 하려고 노력한 결과 큰 진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랑은 남의 악행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고전13:5)

그런데 남이 어려움을 당한 것을 기회 삼아, 그를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치료를 핑계 삼아 “회개해!” 하면서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더욱 더 괴롭힙니다.


물론 스스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는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내가 문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경우를 말하지요. 

폴 토우르니에는 그러한 경우 “고백의 치료적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타인의 고백을 역이용해서 그를 정죄하고, 뒷말하고, 소문을 양산하는 것은 사탄적입니다.

오히려 그에게 용서의 은혜를 나누어줌으로 영과 육, 몸과 마음을 함께 치료하는 큰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인류는 죄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과 질병과 재난과 아픔을 겪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정죄하고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용서하고, 은혜를 베풀고, 사랑하므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질병은 죄 때문이라고 하면서 특정 상황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향하여 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단의 도구가 되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이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하십시요

그들은 죄악 가운데 있었고 큰 환난과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정죄하기 보다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 가운데 오신 이유는 심판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길을 따른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SfrhOxJFs8&t=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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