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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an 02. 2021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왜 떠날 수 밖에 없었나?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창세기 11장에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실 데라 이야기는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습니다. 

갈대아 우르가 어디인지? 데라가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간 것은 언제인지?

데라의 아들이 셋인데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아브라함은 데라가 죽은 후에 떠난 것이 확실한지?

궁금한 것이 많지만, 성경학자들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제가 어떻게 풀어내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가면 저의 궁금증이 다 풀어지겠지요?

그러나 확실한 것은 데라가 자기가 태어나 살았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창세기 11장 27절부터 32절까지 말씀을 근거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데라의 이주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이야기로 남겨 주셨다는 것은 이야기가 담고 있는 스토리에 무한한 상상력을 사용해보라고 하신 줄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경 속으로 들어가 그 때 그 시절을 떠올려 보곤합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동물은 자기 공동체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않습니다. 

자기 공동체에서 떠나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집단 너머 이주(Cross-community migration)를 통해서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자기가 소속한 공동체를 떠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공동체에 합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다시피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언제나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왜일까요?


언어와 문화와 풍습이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과 관점의 확장을 필요로 합니다. 

주인공(리더)들은 고향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시각이 열린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있다기 보다는 다른 문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몸으로 부딪치면서 터득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아픔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성숙하는 것이 사람이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인류 문명은 발전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본토, 고향, 아비집을 떠났다는 것은 위대한 신앙의 여정을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떠나기 이전 이미 그의 아버지 데라가 먼저 집단 너머 이주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 와서 보니, 1세대가 성공하는 것은 매우 희귀한 경우입니다. 

대부분 2세대 혹은 3세대에 가서 성공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한국 부모를 두었기에 이중 언어와 이중 문화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만큼 미국 본토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관점의 다양성을 갖출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런 것 때문에 실패하고 좌절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그것 때문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데라와 아브라함의 이주 케이스는 매우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데라의 이주(떠남)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1장 26절을 봅시다.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가 칠십 세에 세 쌍둥이를 낳았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데라가 칠십 세부터 아들을 낳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칠십세가 되어서야 아브라함을 낳았다는 뜻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의 순서가 기록한 순서대로인지, 아니면 아브라함이 중요하니 아브람부터 먼저 쓴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홀이 하란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29절) 

그렇다면 하란이 장자로서 둘째 셋째와 나이차이가 꽤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하란의 아들 룻이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으로 떠나는 것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하란이 장자이고 아브람이 제일 막내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건 그저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하란이 죽었습니다. 

데라 입장에서 보면 큰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죽은 이유는 나와 있지 않으므로 알 수 없지만, 큰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 데라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막내 동생이 30대 후반에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아버지가 받았던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막내가 떠난 후 급격히 무너지면서 치매에 걸렸습니다. 

막내의 죽음도 그러하거늘 큰 아들의 죽음은 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28절에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죽었더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에 ~보다 먼저” (파님 פָּנִים)은 뜻이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하란은 그 아비 데라의 면전에서 죽었더라”고 하였습니다. 

데라가 받은 충격을 강조하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며느리로 맞아들인 사래가 임신하지 못하였습니다. (30절) 

고대 사회에서 며느리가 임신하지 못한다는 것은 저주로 해석했습니다. 

데라는 창세기 족보에 의하면 노아의 9대 장손입니다. 

집안의 대를 이어가고, 번창시켜야 할 막중한 사명이 자기 대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데라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데라가 고향을 떠나야겠다는 결정을 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자신은 저주받은 자이고, 그러기에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데라는 자기 대에는 망했지만, 아들인 아브람 대에서는 뭔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전기를 마련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하란입니다. 


하란은 우르 왕국의 국경 도시이고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좌로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고, 우로는 중앙 아시아로, 북서로 올라가면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길입니다. 

가능성이 많은 곳이란 뜻입니다. 

데라가 하란으로 온 까닭은 자녀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데라가 205세에 하란에서 죽은 후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떠난 것처럼 쓰여졌습니다. 

성경 기록이 시간적 순서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면 여기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실 성경은 시간 순서를 지키지 않고 중요한 것부터 먼저 기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고대 사회에 시계도 없고, 달려도 없는 때 시간 개념과 오늘의 시간 개념이 다릅니다. 


만일 오늘날 숫자 개념으로 생각하면 205-70=135입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는 75세입니다. 

그렇다면 데라가 죽은 후에 떠난 것이 아니라 데라가 살아 있을 때 떠났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저는 데라가 아브람이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는 것을 적극 지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데라의 계획이었습니다. 


역사는 바로 이런 떠남의 결단을 하는 사람들이 주도해 가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에 순응하며, 환경에 순응하며, 죽은 물고기처럼 떠내려가는 사람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새롭게 열어가는 사람, 과감히 전통과 관습을 깨고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을 지지하십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가만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혁신적이었습니다. 


아브람이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데는 그의 아버지 데라의 적극적 지지가 있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희생 덕분에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오늘도 말없이 수고하고 희생하는 아버지들에게 무한한 격려를 보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KDsOOW0ZhA&t=3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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