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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an 09. 2021

종교 중독, 윤리 실종

오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유대인을 왜 그냥 지나쳤을까요?

그들은 이웃 사랑의 계명을 몰라서 그냥 지나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비유는 어느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도전하면서 나왔습니다.

이 율법 교사는 율법의 핵심이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인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당대 율법학자나 제사장 레위인들도 이웃사랑의 계명이 율법의 핵심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결정적 순간에 모른척 하고 그냥 지나갔을까요?

제사장이나 레위인 중에 한 사람만 그렇게 했다면 그놈이 나빠서 그랬다고 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그냥 지나갔다면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전 그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란 책을 쓴 케네스 베일리는 그의 책에서 유대교의 의식법 때문이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부상자가 강도들에게 맞아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아직 죽진 않았지만, 그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 옮기는 도중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체를 만지게 되고 따라서 유대교의 정결법을 어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되면 일주일 동안 정결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 동안 십일조를 먹을 수 없고, 십일조를 거둘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율법의 핵심인 사랑 실천 계명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 실천 계명보다 유대교의 의식법, 정결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동시에 일주일 동안 수입이 끊어진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의 핵심 가르침보다 종교의 의식과 형식을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거기에 손해 보지 않으려는 물질적 욕심이 작동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종교 중독된 사람이 보이는 특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비유에 대해서 율법학자가 반발하지 않은 것을 보아서 당시 유대 율법학자나, 제사장 레위인들이 이런 경우를 만나면 틀림없이 모른 척 외면하고 지나갈 것을 인정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전형적인 모습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말하지만, 그들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유대교의 형식과 의식을 지키는 것이고, 그 뒤에는 자기는 손해 보지 않고 자기 이익을 지키겠다는 욕심이 함께 작용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어떤가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는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은 사랑 실천입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 이웃이 고통받고 괴로워할 때 도움의 손길을 뻗칠까요?

아니면 이런저런 이유로, 이를테면 정치적인 이유, 경제적인 이유로 피해자들을 향해서 돈만 밝힌다느니, 이런 사건을 계기로 해서 반대편 정당의 논리를 따른다느니 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정죄하고 손가락질하지 않습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기독교의 형식과 의식을 지키는 것은 목숨을 걸고 주장하면서 자기 이익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선 순교의 각오를 하면서,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외면하지 않습니까?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이상 축소될 수 없는 윤리의 토대는 동료 인간의 고통을 접하는 즉시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것이다. … 고통받는 자를 도와야겠다는 의무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 할 수만 있으면 도와야겠다는 인식을 못 하는 것, 또는 내가 접하는 고통받는 자가 선한 사람이거나 연민이 많은 사람이거나 내가 아는 사람일 경우에만 의무감을 느끼는 것은 전혀 윤리적인 태도가 아니다. 본인이 얼마나 많은 원칙을 따르든지 또 그런 원칙들을 위해 생명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더라도 그렇다.


오늘날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도가 땅바닥에 떨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리나 가르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통당하는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하여 무언가 해야 할 때 정말 행동으로 나서서 그 가르침을 실천합니까?

가르침이 아름답고 완벽하고 훌륭하지만 실제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고 말로는 크게 떠벌려놓고, 정작 자기 자녀나 가족을 위해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이익 챙기기를 한다면, 그의 정치적 견해가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들은 욕을 하는 법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고, 종교라는 형식과 의식을 지키기에만 열중하고, 자기 이익과 기득권 챙기기에만 열중한다면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모른 척 지나가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중독자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가르침을 외면함으로써 사회적 신뢰도를 추락하게 하고, 윤리 실종으로 이끌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착한 일을 하자 가르치는 것은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정말 지적하고 싶으신 것은 종교에  중독된 유대 율법 교사의 실체를 정확히 지적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가르침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율법 교사도 잘 알고 있고, 제사장, 레위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종교에 중독되어 정말 실천해야 할 가르침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게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날 기독교가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다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선행, 단순한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종교 중독자들을 향한 따끔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기독교가 이 비유를 의미 있게 듣지 않는다면 정말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하루빨리 종교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XgB6thHt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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