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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an 13. 2021

아브라함이 사용한 지도

지난주 우리는 아브라함의 길 떠남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성공을 위해, 복을 위해 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길을 떠나려면 삶이 단순해야 합니다.

짐이 많으면 떠날 수 없지요.

아브라함이 길을 떠날 수 있도록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가 쉽게 길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준 분은 그의 아버지 데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아버지 데라는 아브라함을 이끌고 이미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사는 곳은 하란입니다.

고향 땅이 아닙니다.

아버지 덕분에 이미 고향을 떠나 본 아브라함에게 새롭게 길을 떠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 데라는 아브라함이 길을 떠날 수 있는 발판을 다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고대인의 세계관입니다. 

얼음과 눈으로 덮인 세계에서 생활하는 캐나다의 바히랜드 에스키모는 그들이 생활하는 공간 밖에는, 마술사의 힘으로 지배되는 신화적인 세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인디언 유로크족들도 자신들이 사는 세상 밖의 바다 저편 다른 육지에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바히랜드 에스키모나 캘리포니아 인디언 유로크족들에게 세계는 두 개의 영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영역과 그들이 잘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는 상상력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지의 세계는 어떤 곳일까요?


저는 외국에 처음 나갈 때의 두려움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온 가족을 이끌고 필리핀으로 떠나는 데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했습니다.

말도 못하고, 문화와 풍습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곳을 향하여 온 가족을 이끌고 가는데, 가장으로서 느껴야 할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누가 나를 인도해주고 이끌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행히 선교사 훈련 센타에서 공항으로 픽업을 나와 주었기에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아버지 데라가 새로운 출발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고 하지만,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막막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러한 아브라함의 심정을 “갈 바를 알지 못하였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을까요?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이야기하였습니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건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인도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미지의 길을 떠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지도입니다.

지도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쉽게 생각하는 것은 종이 위에 그려진 지도입니다.

고대인이 그린 지도와 현대인이 그린 지도를 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지도는 그 시대를 반영합니다.

현대인의 지도는 정확한 측정을 통해 사실만 그려넣었습니다.

어찌보면 참 무미건조합니다. 

그러나 고대인의 지도는 정확한 사실 보다는 상상과 사실을 섞어 그렸습니다. 


고대인들의 지도는 정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대충 짐작으로 길을 잡아갑니다.

낮에는 열심히 걷다가 밤이 되면 하늘의 북극성을 바라보며 자신이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았습니다.

밝은 낮에는 열심히 걷고, 어두운 밤에는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고, 반성하며,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낮과 밤, 빛과 어둠은 그들을 인도하는 좌표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길을 찾아 걸어갔을까요?

아브라함 시대에 지도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 있었던 것은 종이 지도가 아니라 마음의 지도였습니다.

마음의 지도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지도는 하나님 바로 그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대인들이 낮에는 걷고 밤에는 하늘의 별을 보았듯이, 아브라함 역시 낮에는 길을 걷고 밤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는 매일 밤마다 하나님이 부르신 의미를 되새겨보았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1-3)


하나님의 말씀을 언뜻 들으면 착각하기 딱 쉽습니다.

복이란 말이 반복되면서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해진다고 하시니 누가 들어도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현실을 보면 민족을 이루기는 커녕 아들 하나 없었습니다.

그의 부인 사라가 죽었을 때 매장지가 없어서 헷 족속에게 사정사정해서 겨우 굴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서 얻은 땅은 오직 그것 하나 뿐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세상의 부귀 영화를 목적으로 삼았다면 하란을 떠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르나 하란에서의 삶이 훨씬 더 풍요롭고 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오히려 마지막에 하신 말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가 아닐까요?

그는 자기보다 땅의 모든 족속을 위하여 부름받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부르심의 목적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하나로 연결됩니다.


온타리오 리디머 대학의 알버트 월터스(Al Wolters, 1942~) 교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삶의 기준이 되는 어떤 신조나 삶의 여정을 안내할 어떤 지도가 필요하다”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비전이란 지도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어떤 지도가 있습니까?

지도는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그래서 지도는 나의 인생길을 어떻게 가야할지 알려줍니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는 한결같이 경제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경제를 다른 말로 말하면 물질이지요. 돈이지요.

그 물질을 어떻게 분배하느냐 방법론때문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나뉘어졌습니다.

이 둘은 매우 다른 것 같지만, 방법론만 다를 뿐 목적은 같습니다.

물질 중심주의입니다.

공산주의는 물질을 공동생산해서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자.

자본주의는 자본(물질)의 흐름에 세상을 맡기자. 

물질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면 세상은 살기좋은 곳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 사상의 마음 지도는 돈입니다. 물질입니다. 


프로이트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억압된 성적 본능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들은 세상이 성적 본능, 감정적 본능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본능에 충실하라고 가르칩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는 인간을 자극과 반응 매커니즘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의 해석 틀을 살펴보면 그들의 마음지도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해석 틀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처럼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땅의 사람들이 말하고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 속에 어떤 지도를 가지고 계십니까?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믿노라고 말을 하고, 형태상의 종교생활을 하지만, 세상의 가치에 휘둘려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길을 인도하는 지도로 말씀을 주었습니다. 

제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지도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지도를 볼 때 사실 감동이 많지 않습니다.

그냥 색칠한 종이에 불과하다고 느끼기가 쉽습니다.

바닷가에 가서 넘실대는 파도와 끼룩끼룩 울어대는 갈매기와 비릿한 바닷냄새를 맡는 것이 훨씬 더 감동적입니다.

지도는 아무런 감동이 없이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도라는 맹맹한 그림 속에는 수많은 사람의 경험과 감동이 숨어 있습니다. 

태평양의 넓은 바다를 직접 항해하면서 모험하고 때로 목숨을 잃은 선각자들의 경험 덕분에 우리는 태평양 지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경험은 우리가 바닷가에서 한나절 느끼는 경험보다 훨씬 크고 웅대합니다.

그러므로 무미건조한 종이 뒤에는 우리가 경험하고 느낀 것보다 훨씬 생생한 경험 덩어리가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보면서 바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성경은 그저 책입니다. 

어떤 때는 졸립기도 하고,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 숙제하듯 읽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 성경은 우리보다 앞서 신앙의 길을 걸어간 무수한 사람들이 직접 경험한 놀라운 경험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경험은 우리가 기도시간에 만났던 하나님보다, 우리가 찬양하며 눈물 흘렸던 감격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영성, 우리의 경건, 우리의 믿음은 앞선 신앙 선배들에 비하면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모든 위대한 신앙 선배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는 예수님에게 와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아브라함은 미지의 길을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실수하고, 죄를 짓고, 방향을 잃고 헤맬때도 많았지만, 그는 마음의 지도인 하나님을 늘 바라보며 교정하면서 길을 걸어갔습니다. 

바른 길, 곧은 길만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넘어지고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지도가 분명한 사람은 반드시 바른 길을 걷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의 길에 도착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길 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일생 방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생 길을 걷는 동안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어느 곳에 있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곳은 그의 도착지요, 살 곳이었습니다. 

우리 인생길도 어쩌면 도착지를 모르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다면, 어느새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도착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거기에서 우리는 모두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길 제일 끝에 하나님은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이하여 주실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모릅니다. 

우리의 길이 어떻게 끝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 길의 지도가 확실하다면, 놀랄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담대하게 그리고 기쁨으로, 동행의 행복을 느끼면서 한걸음 한걸음 걷다보면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날까지 우리 힘있게 걸어갑시다. 

https://www.youtube.com/watch?v=RI1Xn-QqbSA&t=1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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