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야. 힘들지 않니?”
문을 반쯤 열고 밖을 내다보는 지아에게 물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8살 지아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아니요. 힘들지 않아요.”
지아는 3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바이올린에 재능을 보인 지아는 연주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콩쿠르에 나가 우승을 하면서, 더욱 바이올린 연습에 집중한다.
매일 5시간씩 연습하는 지아가 대견하여 ‘힘들지 않냐’고 질문하였는데, 지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지아는 올해 베토벤 250주년을 기념한 국제 콩쿠르(Grand Prize Virtuoso)에서 우승하였다.
지아는 코로나 상황을 뚫고 독일 본에 가서 연주하였다.
지아가 연주한 곡은 이탈리아 작곡가 가에타노 푸그나니(Gaetano Pugni, 1731~1798)의 ‘Kreisler Praeludium and Allegro’이다.
그런데 오기로 한 반주자가 오지 않았다.
연주 시작 10분 전에 그 소식을 들은 관계자들은 당황하였다.
이리저리 뛰던 관계자가 마침내 반주자를 구하였다.
갑자기 구한 반주자와 딱 한 번 손을 맞춰보고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지아는 마음 편한 환경에서 연주하였다.
가족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반주한 피아노 선생님과 함께하였기에 각종 콩코루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첫 해외연주에 반주자는 바뀌었고, 반주 호흡은 맞지 않았다.
앞좌석에서 앉은 독일 음악가들은 뚫어지게 지아를 쳐다보았다.
“지아야 당황하지 않았어?”
내가 물었다.
“아니요. 반주 선생님과 호흡이 맞지 않아서 제가 생각했어요. 제가 반주를 이끌어야겠다고요.”
지아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였다.
지아는 자신있었다.
그동안 충분히 연습했고, 그 성실함으로 모든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렇다. 연습도 재능이고, 성실도 재능이다.
“지아야. 넌 앞으로 세계를 누비며 연주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거야.”
나의 말은 진심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아가 세계적인 연주자가 될지 안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바이올린으로 세계적인 연주자가 되는 길은 절대 쉽지 않다.
바이올리니스트로 걸어가야 할 길은 험난하다.
그 길에는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언제 환하게 걷힐지 모른다.
지아의 앞길은 불안, 염려, 불확실, 두려움이 뒤엉켜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뚫고 나가는 유일한 무기는 성실한 연습이다.
성실은 존재를 만든다.
장기려 선생에게 “어떻게 하여 ‘성실한 삶’을 살게 되었냐”고 물었을 때, 그는 서슴없이 사랑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지아가 매일같이 성실하게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것은 바이올린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매일같이 글을 쓸 것이다.
오늘 하루 누군가를 진실하게 사랑하면, 그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성실이 꼭 성공으로 이끈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 성실이 나를 만드는 건 사실이다.
직책이나, 신분이나, 외모가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일본의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규칙적이며 성실한 생활’ 따위의 도덕으로는 이미 사회에 깔려 있는 레일 위에서 그냥 그대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인간이 될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난 반대로 생각한다.
성실은 이미 사회에 깔린 레일 위를 따라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이 아무런 생각 없이, 그 레일 위를 가기에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산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싶어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으면 그것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땅에 오면서부터 자신의 소명을 따라 성실하게 살았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걸어가는 그 성실함이 십자가를 지는 자리까지 갈 수 있게 하였다.
설령 죽음이 앞에 있고, 십자가의 고난이 앞에 있지만, 예수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대로 끝까지 성실하게 나갔기에 고난의 십자가를 질 수 있었다.
나는 죽음의 자리까지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오늘 하루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미래는 불안하지만, 그 불안을 극복했던 지아의 성실함을 나는 본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