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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Feb 09. 2022

빈센트 반 고흐의 하나님

빈센트 반 고흐는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화가이다.

그의 몽환적인 그림과 특유의 색감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반 고흐의 신앙이나 영성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서양 화가들이 많이 그린 성화를 별로 그리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에 기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흐는 한때 목사가 되려 하였다.

실제로 그는 탄광촌에 가서 평신도 사역자로 전도 활동과 봉사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목사의 꿈을 접고 화가가 되었다.

이를 두고 일반 미술사가들은 고흐가 기독교를 버리고 화가가 되었다고 해석하였다.

일본의 오사카대학의 코데라(T. Kodera)가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는 고흐가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의 신을 버리고 자연의 신을 섬겼다고 주장하였다(안신, p.11).

또한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반 고흐가 정신병자였다고 주장하였다(김상근, p.173).

유명한 철학자의 주장에 많은 사람은 별 생각 없이 고흐는 정신병을 알았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많은 학자가 반 고흐의 작품과 그의 일생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또는 심리학적으로 해석하였다.


고흐를 아끼고 사랑했던 헨리 나우웬은 하버드 대학에서 고흐 세미나를 여러 차례 인도하였다.

헨리 나우웬은 고흐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고흐의 해석에 정신분석학의 수준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Cliff, p.10).

그때 클리프 에드워드(Cliff Edwards)는 고흐가 제도종교로서 기독교를 떠나긴 했지만, 자신의 경험과 독서를 통하여 은혜의 새로운 통로로 그림을 선택하였음을 입증하는 책 ‘반 고흐와 하나님’을 출간하였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고흐)는 예술을 통해 우리를 마음의 변화로 초대합니다. 빈센트는 언제나 목회자로 남아 있었고, 그의 그림과 그림 앞에서 우리는 회심의 부름을 경험합니다. 이 사실이 바로 고흐의 그림이 지닌 가장 보편적인 호소력일 것입니다.”(Cliff, p.11)


고흐는 정말 기독교를 포기하지 않고 그림으로 기독교 정신을 표출하려고 했을까?

일반 미술사가들이 애써 외면하고 무시했던 고흐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자.

1853년 3월 30일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흔히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칼빈주의를 따랐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진 않다.

1603년 레이덴 대학의 신학 교수로 있던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를 주창하였다.

한국적 상황으로 이해하자면, 장로교는 칼빈주의를 따르고, 감리교나 침례교는 알미니안주의를 따른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 고흐의 아버지는 어느 쪽이었을까?

반 고흐 아버지의 신학을 깊이 연구한 에릭슨(Erickson P. Kathleen)에 따르면, 반 고흐의 아버지는 알미니안주의를 지향하는 흐루닝언 파에 속하였다(Erickson, p.48).

신학 사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빈센트 반 고흐의 아버지가 칼빈주의를 따랐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심지어 총신대 라영환 교수마저 빈센트 반 고흐가 칼빈주의를 따랐다고 주장하는 데, 이는 지나친 우 편향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반 고흐 집안은 조상 적부터 화상 아니면 목사가 많았다.

빈센트 반 고흐 역시 목사와 화상 혹은 화가의 길을 두고 고민을 하였다.

그는 먼저 화상의 길을 걸었다.

1873년 런던의 구필 화랑에서 일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아버지의 신앙과는 결이 다른 복음주의를 접하였다.

즉 유명한 청교도인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게 되었고, 당대 유명한 복음주의 설교자 스펄전의 설교를 들었다.

그는 책을 즐겨 읽었는데,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세 권의 책이 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르낭의 ‘예수전’이다.

총신대 라영환 교수는 빈센트 반 고흐가 이 세 권에 영향을 받은 것은 그의 안에 기본적으로 흐르던 기독교 정신과 잘 맞아떨어졌기에 영향받았다고 해석하였다(라영환, p.81).

무엇이 먼저인지 무엇이 나중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고흐는 십자가를 지며 고난받는 연약한 그리스도, 자신의 온몸을 내어주며 희생하고 헌신하는 그리스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는 목회자가 되기로 하고 신학교 입학을 준비하였다.

신학교 입학시험을 위해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해야 했는데, 그는 회의를 느꼈다.

당장 그리스도의 섬김과 사랑과 헌신을 실천하고 싶은데, 머리 아픈 언어 공부를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갈등하였다.

사실 그는 독일어, 네덜란드어, 영어,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는 당장 현장에 뛰어들어 사역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고전어(그리스어, 라틴어) 공부를 게을리하였다.

결국 신학대학 입학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평신도 사역자로 벨기에 보리나주 탄광촌의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르낭의 예수전을 읽고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그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또한 민중에 대한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민중과 함께 있음으로써 편안함을 느꼈다. 그의 생각으로는 복음서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져다준 것도 바로 그들에게이다”(Renan, p. 173)

고흐는 가난한 탄광촌에서 헌신하였다.

온 힘을 다하여 그들을 돌보았으며, 그들을 섬겼다.

그는 탄광촌의 가장 가난한 사람보다 더 가난해지기를 원하였다.

그는 가진 옷을 전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으며, 그들의 비참함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희생하였다.


그는 복음 전도사역 중에 동생에게 편지하였다.

“내가 얼마나 성경에 이끌리고 있는지 너는 잘 알지 못할 거야. 나는 매일 성경을 읽어. 성경 말씀을 내 마음속에 새기고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다’라는 말씀에 비추어 내 삶을 이해하려고 해.”(라영환, p.81)


그러나 1870~1889년 총회보고서는 빈센트 반 고흐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반 고흐는 병자와 부상자를 돌보는 일에서 매우 훌륭한 자질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도움이 필요 한 사람들을 위해 잠자는 것을 희생하고 자신의 가장 좋은 옷을 모두 기부함으로써 헌신과 자기부정의 증거를 반복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중을 이끌 지도자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말씀의 은사가 부족합니다. 만일 그 점만 보완된다면 그는 분명 훌륭한 전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Farrell, p.78)

교인들마저 반 고흐를 괴짜로 여겼다.

결국 빈센트 반 고흐는 복음전도 사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의 친구가 되고, 상처받는 사람의 위로자가 되고 싶어 목회자가 되려 했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가 정식 신학교육도 받지 못했고, 설교나 전도에 능통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이 받은 사명과 소명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그려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기로 하였다.

안동대 미술학과 서성록 교수는 이렇게 썼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그림으로써 가난하고 연약하고 상처받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탕감받고 싶어했습니다. 고흐는 언제나 낮은 곳에 머무르며 생의 본질을 철저히 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존경은 고흐의 예술정신이 추구하는 목표가 되었습니다.”(서성록, p.21)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자신의 마음가짐을 편지하였다.

“나는 이 세상에 빚과 의무를 지고 있다. 나는 30년간이나 이 땅 위를 걸어오지 않았나! 여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림의 형식을 빌어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다. 이런저런 유파에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남기고 싶다. 그것이 나의 목표다.” 1883년 8월 4~8일(Gogh, p.99)
“나는 사람을 그릴 때 어떤 영원함을 표현하고 싶다. 옛 화가들이 후광을 넣어 표현했던 영원함을 이제는 찬란하고 선명한 색채로 표현하고 싶다.”1888년 9월 31일 (소태영,p.326).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1879년 10월 15일 (Gogh, p.14)
“복음 속에 렘브란트가 있고, 렘브란트 안에 복음이 있다.” 1880년 7월 (Gogh, p21)


사실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에는 복음과 관련하여 풍성한 영성을 담은 글이 많은데 그의 편지를 출간하는 일반 출판사들이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빼고 출간하였다(Farrell, p.75)

그건 일반 미술사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능하다면, 고흐의 기독교적 배경을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난과 고난과 희생을 추구하는 것을 정신병적 현상이나 광신적 현상으로 곡해하였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재발견은 꼭 필요한 작업이다.


참고도서

Cliff Edwards, Van Gogh and God, Chicago, Ill. : Loyola University Press, 1989.

Erickson P. Kathleen, At Eternity’s Gate (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 안진이 옮김, 청림출판, 2008.

Farrell, Lindsay T., Visual Metaphors Of Creation And Redemption In The Assisi Frescoes, The Art Of Michelangelo And Vincent Van Gogh: Their Implications For A Post-Modern Aesth, Regent College, M.C.S. 1993.

Vincent Van Gogh,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옮김, 위즈덤하우스, 2008.

Renan Joseph Ernest, La vie Jésus(예수전), 박무호 옮김, 홍성사, 1986.

김상근, 선교사 빈센트 반 고흐, 신학논단, 55, 2009.3, 171-213(43)

라영환,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예술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정신, 신앙과학문 20(4), 2015, 69-85

서성록, 반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 연구, 예술과 미디어 12권 3호, 2013, 7-30(24)

소태영,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예술 속에 내재되어 있는 종교적 영성과 영성 교육적 적용 및 실천 , 한국 기독교신학 논총 103, 2017. 1. 311-344(34)

안신, 고흐의 종교와 예술에 관한 연구, 대학과 선교 제42집 2019.  7-39(33) 


https://youtu.be/aMqGlNBLV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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