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학자인 월터 브루그만은 선지자는 산문이 아니라 시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면서, 예언자는 필연적으로 예술가가 된다고 하였다(Brueggemann, p.16). 거꾸로 이야기하면 예술가의 기질 속에 사회를 향한 선지자적 기능이 있는 듯하다. 고흐는 그림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는 일생 약 900여 점의 유화를 그렸다. 고흐의 그림 중에 눈에 띄는 것은 더 이상 신을 수 없을 낡은 구두 그림이다. 고흐는 구두 그림을 여러 차례 그렸다. 신발 끈이 풀린 구두, 뒤집어 바닥을 보인 구두, 밑창이 헤어진 구두. 고흐가 구두 그림을 여러 차례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삶의 고단한 흔적을 담기 위해서 그린 것일까?
고흐의 구두 그림을 보고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예술론을 전개하였다. 하이데거는 고흐가 그린 구두는 농촌 아낙네의 것이라고 상상하고선 예술에 대해 설명하였다. 철학자의 언어라서 그런지, 나 같은 범인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예술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고흐가 구두를 그림으로써 농촌 아낙네의 존재를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 예술의 본질을 밝혔다고 하였다(하피터, P49).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은 ‘진리의 비은폐성’에 있다고 하였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예술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연 하이데거의 생각처럼 예술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진리의 비은폐성)일까? 그렇다면 고흐의 구두는 농촌 아낙네의 것이 맞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도 하이데거는 아무런 검증도 하지 않고, 그냥 자기만의 상상으로 그렇게 단정지었다. 만일 고흐의 구두가 농촌 아낙네의 것이 아니라면 ‘진리의 비은폐성’이란 말은 맞지 않는 말이 된다. 사실 고흐 당시 농촌의 농부나 아낙네들은 구두가 아니라 나막신을 주로 신었다(박정자, p167). 고흐가 그린 농부들 모습을 보면 나막신을 신은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건 밀레도 농촌생활을 동경하고 농부처럼 되고 싶어 나막신을 많이 신었다(Naifeh & Smith, p.492).
미국의 미술사학자 사피로(Schapiro M.)는 1868년 발표한 논문에서 고흐의 구두는 농촌 아낙네의 것이 아니라 고흐의 것임을 밝혔다. 1994년, 그는 ‘미술 이론과 철학’(Theory and Philosophy of Art)이란 책을 출간하면서, 전에 쓴 논문 “개인 물건으로서 정물화 : 하이데거와 반 고흐에 대한 노트, The Still Life as a Personal Object - A Note on Heidegger and van Gogh”을 포함하였다. 그는 미술사학자답게 고흐의 구두와 관련된 자료들을 면밀하게 조사 검토하였다. 마침내 그는 고흐의 구두는 고흐 자신의 것임을 증명하였다. 고흐의 구두 그림이 고흐의 것인지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샤피로는 고흐의 구두와 관련된 의미 있는 자료를 찾아내었다. 그건 고갱이 고흐를 회상하면서 쓴 글이다. 샤피로는 그 글을 그대로 소개하였다.
방에는 낡고 진흙이 묻은 한 켤레의 징 박힌 구두가 있었다. 고흐는 이 구두를 소재로 주목할 만한 정물화 한 점을 그렸다. 나는 왜 이 낡은 유물 뒤에 어떤 이야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다른 사람이라면 쓰레기통에 던질 것을 그처럼 소중하게 간직하는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는 목사였소. 나의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장차 목사가 되려고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지요. 젊은 목회자로서 나는 어느 맑은 날 아침, 가족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벨기에로 떠났소. 내가 배웠던 대로가 아니라 나 스스로 이해한 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소. 당신이 보는 이 구두는 그 힘겨운 여행길을 용감하게 견뎌 주었다오.”
보르나지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동안 빈센트는 탄광 화재 사건에 부상당한 한 사람을 간호하게 되었다. 그 남자는 심하게 화상을 입고 신체가 손상되어 살 가망이 없어 의사마저 포기하였다. 의사는 오직 기적만이 그를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고흐는 그의 곁에서 40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그를 돌보았으며, 마침내 광부의 생명을 구하였다.
고흐는 말하였다.
“벨기에를 떠나기 전, 나는 얼굴에 많은 상처가 있는 그 사람의 모습에서 가시 면류관의 환상을 보았소. 마치 부활한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은 환상이었소.”
그리고 Vincent는 다시 팔레트를 들고 조용히 그림을 그렸다. 그 옆에는 하얀 캔버스가 있었다. 고갱은 그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친절과 겸손을 설교하는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다.(Schapiro, p.140-141)
고흐의 구두는 복음을 전하러 가던 자신의 모습과 그 가운데 기적과 같은 은혜로 치유하는 예수님을 경험한 상징물이었다. 다 낡아 버릴 수밖에 없는 신발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하고 여러 차례 그린 이유는 분명하다. 철학자 하이데거나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사변적인 예술론을 전개하는 도구로서 그린 것이 아니다. 시인 이승훈은 고흐의 구두는 고흐의 자화상이었다고 주장하였다(이승훈, p.137). 고흐의 구두는 복음을 전하면서 겪었던 모든 고난을 함께하였다. 고흐의 구두는 그의 단순한 자화상 즉 삶의 고단함과 고통을 표현하는 자화상이 아니다. 고흐의 구두는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파했던 그 시절을 기억나게 하면서, 동시에 구두를 그리므로 전에 복음을 전하던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과 유사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이나 칭찬받기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그림을 통해서 세상에 약한 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 곁에 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그렸던 것이다. 그에게 그림은 복음을 전하는 또 다른 수단이었다.
그것은 일반인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고흐만의 독특한 신앙 영성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일반 학자들이 분명 샤피로의 글을 읽었으면서도, 고갱의 글을 소개하지도 않고 철학자들의 글만 옳다고 하거나, 혹은 고갱의 글을 소개하면서도 예수님을 예술로 바꾸어 번역하는 등 의도적으로 고흐의 모습을 왜곡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정직한 양심으로 고흐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이 많았으면 정말 좋겠다.
Brueggemann Walter, Finally Comes the Poet(마침내 시인이 온다), 김순현 옮김, 성서유니온, 2018
Naifeh Steven and Gregory White Smith, Van Gogh : The Life(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 최준영 옮김, 민음사, 2016.
Schapiro M., ‘The Still Life as a Personal Object - A Note on Heidegger and van Gogh’, Theory and Philosophy of Art: Style, Artist, and Society, George Braziller, 1994.
박정자, 빈센트의 구두, 기파랑, 2005.
이승훈, ‘고흐의 예술과 광기(1)’, 시와세계 (45), 2014, 3, 122-139(18pages)
하피터, ‘하이데거의 회화론’, 존재론연구 16권 2007, 33-59(27pages) 한국하이데거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