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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Feb 21. 2022

우리는 초대교회를 오해했다.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의 경제상황은 어떠했을까? 그 당시 경제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는 없다. 다만 여기저기 파편처럼 흩어진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전 재산 두 렙돈을 헌금하였다. 두 렙돈은 얼마나 될까?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었다(마20:10). 한 데나리온은 64고드란트였고, 렙돈은 그 고드란트의 절반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이다.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2021년 최저 시급은 8,720원이다. 하루 8시간 일한다고 계산하면, 약 7만 원 정도 된다. 그렇다면 두 렙돈은 약 천 원에 해당한다. 가난한 과부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바친 헌금은 천 원이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제자들은 200데나리온이 들 거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1인당 식대는 1/25데나리온이다. 약 1,750원이다. 남자가 매일 같이 날품을 팔아서 벌어온 돈 7만 원으로 가족들이 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당시는 현대와 달리 핵가족 시대가 아니라 대가족 시대였다. 그들은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자녀가 5,6명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 가족이 8명이라고 계산하면, 하루 세끼를 먹는다고 치면 식비로만 4,2000원 정도 든다.


문제는 일거리가 날마다 있지 않았다.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 사람은 일거리가 없어서 힘들었다. 게다가 그들은 삼중과세를 당하였다. 로마 식민지배하에 있었기에 로마에 바치는 세가 있었다. 대략 수입의 20%가량 세금으로 바쳤다. 그리고 헤롯 정권이 거둬들이는 세금이 있었다. 그것도 대략 20%가량이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거둬들이는 종교세, 십일조나 성전세 같은 것으로 최소 10% 이상 바쳐야 했다. 그러니까 수입의 50% 이상이 이런저런 명목의 세금으로 지출해야 했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은 절대 빈곤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부자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통치자와 제사장들과 일부 부유한 랍비들이 약 1~2%였는데, 그들은 약 5%의 청지기나 감독관과 세리를 두어 93%의 절대 가난 속에 시달리는 평민들을 지배하였다(조태연,p.82). 전승에 의하면, 한 부유한 랍비의 1년 수확은 예루살렘 시민이 십 년 동안 먹을 정도의 양식이었고, 어떤 사람은 천 개의 고을과 천 척의 배를 소유했다고 하며, 어떤 부자는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만 송아지 만 삼천 마리였다고 한다(안병무, p.62). 결국, 일반 평민들은 소작농이 되어 노예처럼 살거나, 강도가 되거나, 다른 나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인구 7백만 명 중 6백만 명이 고향을 떠나 디아스포라가 되었다(조태연, p.74).


가난한 이들은 옷 두 벌이 없었다. 세례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눅3:11)고 하였다. 그건 당시 사람 중에 벌거벗고 사는 사람도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벌거벗었다는 말은 겉옷이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추위에 떨면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정말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그건 폭동과 반란이다. 기록에 의하면, 1세기를 전후해서 팔레스타인에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다. 거짓 메시아가 등장하고 열심당은 칼을 품고 다니며 폭동을 주도했다. 부정과 부패로 얼룩지고, 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해지면서 혁명 세력이 등장하여 세상을 갈아엎자는 논리가 등장했다. 억압에서 해방을, 불평등에서 평등을, 폭력에서 자유를 외쳤다. 이러한 외침은 협상이나 평화를 위함이 아니라 전쟁의 논리였다. 내가 지금 죽게 되었으니 죽기 살기로 싸우려고 할 때 나오는 논리이다.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와 요한도 자신들을 거부하는 사마리아에 불을 내려 멸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사람들의 신경은 날카로워졌고, 극단적이 되었다. 세상에서 외치는 해방, 평등, 자유 뒤에는 이런 극단적이고 극렬한 싸움 논리가 숨어 있음을 간파하기란 어렵지 않다. 어제까지의 약자가 오늘은 강자가 되어, 전에 강자가 했던 악행을 그대로 갚아주자는 논리이다. 심판의 논리는 끊어지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가 되어 사람들 사이에 복수와 갈등만 조장할 뿐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초대 교회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초대 교회는 먹을 것을 서로 나누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행2:44-45)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초대 교회 교인 중에 부자가 이렇게 했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바나바나 아나니아 같은 부자가 있긴 했지만, 절대다수는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가난한 성도들이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은 부자들의 적선과 구제와 봉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성도들의 섬김과 봉사를 기록한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게르트 타이센(Gerd Theissen)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였다.

“가난한 이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은 단순히 자선의 수혜자가 아니라 자선의 주체로 활동했다.”


콩 한쪽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나누어 굶주린 사람에게 주었다. 심지어 초대교회에 금식이 널리 퍼졌는데, 그것은 굶주리는 형제를 먹이기 위하여 자신이 굶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였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하나 된 교회를 향하여 말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그들은 “우리가 교회다”라고 선언하였다. 교회라는 게 뭐냐! 그리스도의 한 몸이 아니냐! 형제가 아파하면 그건 곧 나의 아픔이고, 형제가 굶으면 그건 곧 나의 굶주림이다. 먹을 것이 넉넉하고,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타자에게 조금 나누고 베풀어주는 개념이 아니다. 그건 로마 사람들이 즐겨 하는 행위다. 가난한 사람, 밑에 사람을 경제적으로 도와줌으로써 자기의 정치적 힘을 과시하고, 자기 세력을 규합하는 일이다. 누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느냐에 따라 그들의 발언권과 세력이 큰지 적은지를 판가름할 수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로마인들이 하는 방식을 전혀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윤리를 따랐다. 우리가 교회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다. 초대교회는 공산당이 선동하는 혁명 논리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자들을 공격하거나, 가진 자나 위에 있는 사람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가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저항하기보다는 피해를 받고 당하면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 교회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힘이다.


초대 교회 문서 중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하여 쓴 편지가 있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다.

“그리스도인들과 그 외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는 민족이나 언어 흑은 관습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의 도시에서 고립되어 따로 떨어져 살거나,어떤 특별한 방언을 하거나,또는 어떤 괴상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각에 주어진 대로,희랍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어떠한 시민 생활 가운데서도 삶을 영위하며,그들의 의복과 음식물 그리고 다른 관습들에 일상적인 지방의 관례를 따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 편히 거주하고 있지만, 그곳에서의 그들의 태도는 오히려 나그네와 같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이국땅도 모국이며,어떤 모국도 이방의 나라입니다.

비록 이곳에서 육신 가운데 살 수밖에 없게 되어 있지만,그들은 육신을 좇아 살지 않습니다.

즉 그들은 지상에서 나날을 보내지만, 그들의 시민권은 저 위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은 규정된 법에 복종하나, 그들 자신의 개인적 삶에 있어 그들은 법을 초월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그들을 핍박합니다.

그들은 가난하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며,모든 것에 결핍하나 여전히 모든 것을 풍부히 갖습니다.

그들은 멸시를 받으나, 바로 그 멸시로 인하여 영예롭게 되며,비방을 당하나, 사실은 옹호를 받습니다.

그들은 비방을 축복으로 갚으며,모욕을 예우로 갚습니다.

그들이 행한 선으로 인하여 그들은 악행자처럼 채찍질을 당하며,그러면서도 매질 아래 그들은 새 생명을 얻은 자처럼 기뻐합니다.” (이형의, p.271-3)


참고도서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한국신학연구소, 1993

조태연, ‘갈릴리 경제학’(신약성서의 경제윤리, 신약논단 제4권), 도서출판한들, 1998.

이형의 편역, Early Christian Writings The Apostolic Fathers(초대교회의 신앙문서, 속사도 교부들), 기독교문사, 1989

https://youtu.be/Fzm3sklyV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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