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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an 15. 2022

우리는 지금까지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를 오해했다.

마태복음 13장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로 가득 차 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긴 비유도 있지만, 아주 짧은 비유도 있다.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는 단 한 절의 짧은 비유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일반적으로 이 비유는 바로 이어 나오는 진주를 사는 장사 비유와 쌍둥이 비유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두 비유는 쌍둥이가 아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 ‘천국은 보화와 같다’고 했고 두 번째 비유에서 ‘천국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둘은 똑같은 분석 방법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Kistemaker, p.70). 사실 두 비유는 예수님께서 차례로 하셨는지, 아니면 마태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 비유를 한곳에 모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비유를 해석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보화를 사는 것이 아니라 보화가 묻힌 밭을 샀다는 사실이다. 천국을 찾은 사람은 천국을 사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숨겨진 세상을 샀다(Ellul, p.306). 헬무트 틸리케는 ‘그 밭은 우리가 일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였다(Thielicke, p.75). 보화는 은밀한 장소나 귀중할 것을 숨길 만한 특수한 현장에 있지 않았다. 보물은 있을 리 없다고 여기는 밭, 즉 우리 삶의 현실에 있다(김민웅, p.116).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를 하늘에 있는 줄 생각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는 죽어야 가는 곳으로 먼 미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천국)는 전천년주의자들이 이해하듯, 그리스도 재림 이후 이루어진 평화와 공의의 천년왕국과 같은 것이 아니다(Timmer, p.55).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있다'고 하였다. 농부는 밭을 일구다 암초에 부딪힐 때 “에이 이 망할 놈의 돌”하면서 불평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고통과 아픔과 좌절은 암초 같아 보이지만, 달리 보면 그건 하나님께서 숨겨놓은 보화일지도 모른다. 헬무트 틸리케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삶의 쟁기가 부딪치는 운명의 딱딱한 덩어리, 우리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대하여 화를 내거나 번민하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보화입니다”(Thielicke, p.76).


코로나 상황이 아니더라도 삶에 어려움은 수없이 많다. 오죽하면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하였을까. 삶을 살아가면서 뜻대로 되는 것보다 되지 않는 것이 훨씬 많다. 사람은 인생의 암초 앞에 좌절하고 절망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암초 속에 숨겨놓은 하나님의 보화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자끄 엘룰은 세상을 피하여 천국을 추구하지 말라고 권면한다(Ellul, p.307). 천국은 이 세상이란 밭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씨앗을 땅에서 제거해서는 안 되며, 누룩을 반죽에서 제거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곳은 이 세상이며, 이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한다. 천국은 세상에서 벗어나므로 얻지 못한다. 오히려 세상으로 들어가, 그곳을 개간해야 한다. 비록 그곳이 우리 땅이 아니라 할지라도, 일꾼은 그 땅을 최선을 다하여 개간한다. 보물은 바로 그때 발견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 안에서만 발견하려고 해선 안된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고, 어떤 악조건에서도 그리스도인다운 자세와 품위를 유지하며 일할 때 그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비유를 오해하는 대부분은 보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치러야 할 희생이나 대가에 강조점을 두는 경우다. 블룸버그는 ‘하나님 나라는 너무 고귀하여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어떤 것이라도 희생할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Blomberg, p.355). 불트만 역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려는 결단’이 이 비유를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하였다 (Bultmann, p.8). 그러나 튀빙겐 대학에서 신약학을 가르쳤던 에버하르트 융겔은 '그건 토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하였다.


“그러한 보물에 대해 기뻐하는 자는 이미 결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결단은 이미 내려졌다. 발견이 발견자에게 그러한 결단의 수고를 이미 덜어주었다. 발견자의 저 행위는 희생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Jungel, p.214).


융겔은 '밭 가는 자가 발견한 보물과 그가 치러야 할 대가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언뜻 보면, 밭 가는 자가 밭을 사기 위하여 자기 전 재산을 파는 모습이 훌륭해 보여, 그것을 강조하기 쉽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밭 가는 자의 대가나 희생을 강조하면, 자칫 구원을 얻기 위한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를 강조하는 사상으로 오용될 수 있다.


이 비유의 강조점은 밭 가는 자의 희생이나 대가에 있지 않고, 그 밭에 숨겨진 보화의 가치에 있다. 자끄 엘룰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인간의 반응으로 이 비유를 설명하였다. 창조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보화는 인간이다. 하나님에게 인간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얻기 위하여 가장 귀한 것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지불하셨다. 하나님은 값진 보화인 인간을 얻으려고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사랑을 발견할 때’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나 보잘것없고 초라할 뿐임을 알게 된다(Ellul, p.308).


정확히 계산하면 농부의 전 재산을 팔아도 보화를 사기에 충분치 않다. 그건 그 밭을 사는 정도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밭에 숨겨진 보화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밭 가는 자의 희생과 대가는 보화를 얻기에 절대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라는 보화를 얻기 위하여 치러야 할 희생이나 대가나 공로나 선행은 절대 충분하지 않다. 밭 주인은 소작농에게 밭을 사라고 강요한 적이 전혀 없었다. 밭을 사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판 것을 순전히 밭 갈던 소작농의 자발적인 결단이었다.


보화에 비하면 농부의 희생과 대가가 별 볼 일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한 우리의 희생과 선행과 공로는 보잘것없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결코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치러야 할 대가는 분명 있다. 보화(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공로라는 조건에 따라 주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한다고 할 때 그건 자동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럼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인가? 존 팀머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졌던 가치관,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라고 한다(Timmer, p.55).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세상 나라에서 유지했던 삶의 자세와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어 재조정해야 한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소유 전체를 팔기 위하여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통을 느끼거나 갈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보화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란 사실을 알았다. 그의 발견은 삶을 완전히 뒤엎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이제 완벽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전 재산을 팔아 밭을 사는 사람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만일 그가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린다면, 그가 발견한 보화, 곧 복음,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헬무트 틸리케는 말하였다.

“그 사람이 그 보물을 발견한 후에 모든 것은 변하였습니다. 그는 전혀 다른 새로운 안목으로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를 때 새로운 마음뿐만 아니라 새로운 눈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 숨은 보화를 발견합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생활을 우리의 삶 전부와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저 삶에 붙어 있는 부차적인 종교적 부가물로 여긴다면,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Thielicke, pp.81-83)


틸리케는 현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전부임을 깨닫지 못하고 ‘약간의 하나님’에게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지적하였다.


마지막으로 자끄 엘룰은 일부 교회의 전도 방법에 문제가 있음을 이 비유를 통하여 지적하였다. 일부 교회는 계속해서 지옥과 영벌을 전파하면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소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다. 예수 믿는 자신들은 천국 가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모두 지옥 간다는 메시지다. 매우 도전적이고 공격적이며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이 비유가 가르치는 방식과 정반대이다. 심판에 관한 설교는 성령과 은혜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경고로서 교회 안에서만, 가르쳐야 한다. 그건 그리스도인만이 마지막 심판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Ellul, p.310).


아직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지옥과 영벌을 전하는 것은 파괴적인 자살행위다. 이것은 회개하라는 요청일 수 없고, 사람들의 두려움과 연약함을 이용할 뿐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Ellul, p.311)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보물이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할 것은 복음이지 저주나 심판이나 정죄나 판단이 아니다. 우리는 보화를 발견한 자로서, 언제나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아가 이 보물을 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도서

Blomberg L. Craig, Interpreting the Parables(비유해석학), 김지찬 옮김, 생명의 말씀사, 1996. 

Bultmann Rudolf,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신약성서신학), 허혁 옮김, 성광문화사, 1983.

Ellul Jacques, On Freedom, Love, and Power(자유, 사랑, 능력에 관하여), 전의우 옮김, 비아토르, 2017

Jüngel Ebehard. Paulus und Jesus :Eine Untersuchung zur Präzisierung der Frage nach dem Ursprung der Christologie(바울과 예수), 허혁 옮김, 이화여대 출판부, 1990.

Kistemaker Simon, The Parables of Jesus(예수님의 비유), 김근수, 최갑종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Thielicke Helmut, ‘그리스도와 삶의 의미’(Christ and the meaning of Life), 이계준 옮김,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83년

Timmer John, The Kingdom Equation(하나님 나라 방정식), 류호준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김민웅,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가지 비유와 깨우치는 사람 이야기, 기독교사상 2010. 8, 114-121(8pages), 대한기독교서회


https://youtu.be/am59mq2sGq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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