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나는 밀밭’은 반 고흐의 많은 작품처럼 오해와 논란으로 가득합니다.
이 그림은 반 고흐의 죽음을 암시한다거나 정신병이나 그의 심각한 우울증(Derek, p.29)을 반영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946년에 발표된 마이어 샤피로의 유명한 해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비평은 ‘불길한’ 요소인 날아드는 검은 까마귀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이 반 고흐의 정신병적 발작이 임박했다는 표시라고 주장한다. “작가의 의식은 혼란에 빠져 있다. 세상이 그를 향해 다가오지만 그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사방이 막혀 꼼짝도 못하게 된 데다 불길한 징조까지 보인다. ‘관찰자인 화가(Paninter-spectator)’는 세 갈래로 갈라지는 길 위를 빙빙돌며 이쪽저쪽에서 날아드는 까마귀들의 목표물이 되어 겁에 질리고 정신이 분열된 상태다.”(Erickson, p.300).
구쪼니는 까마귀 나는 밀밭은 소란스러운 하늘 아래 광활하게 펼쳐진 밀밭을 묘사한 것으로 슬픔, 극도의 외로움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합니다(Guzzoni, p.189).
스티븐은 ‘까마귀 나는 밀밭’에는 나무 한 그루, 집 한 채, 교회 첨탑 하나도 없는 모습은 황량함의 극단적 표현으로서 불안한 하늘, 거세게 휘도는 밀밭, 불길한 어둠과 점점 더 진해지는 파란색 성난 뇌운을 통해 슬픔과 극단적 고독을 표현했다고 합니다(Steven, p.913-4).
결국 이 작품은 자살하기 며칠 전에 완성한 그의 마지막 그림 중 하나라고 데릭 펠은 주장합니다(Derek, p.29).
어빙 스톤(Irving Stone)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여 ‘Lust for Life’라는 고흐의 전기 소설을 씁니다. 이 소설을 기반으로 빈센트 미넬리(Vincente Minnelli)감독은 1965년 ‘열정의 랩소디’(원제 : Lust for Life)를 연출하여 마치 ‘까마귀 나는 밀밭’이 그의 마지막 작품인 양 표현하였습니다. 작가의 상상에 의거하여, 영화에는 반 고흐가 광기에 취한 채 ‘까마귀 나는 밀밭’을 그린 후 권총으로 자살하는 장면이 있습니다(Erickson, p.301).
그렇다면 ‘까마귀 나는 밀밭’은 마지막 작품일까요?
지금까지 ‘까마귀 나는 밀밭’이 그의 마지막 그림으로 여겨진 주된 이유는 그림에 담긴 불김함 때문입니다.
라영환 교수는 이 작품은 반 고흐가 그린 마지막 작품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반 고흐가 7월 23일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도비니의 정원〉에 대한 설명과 드로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도비니의 정원〉이 마지막 작품일 가능성이 더 높다.
반 고흐는 오베르에서 밀밭을 소재로 한 작품을 여러 점 남겼다. 〈까마귀 나는 밀밭〉도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작품은 아직 추수가 끝나지 않은 밀밭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그가 그린 〈오 베르의 추수하는 사람들>, <추수가 된 밭이 보이는 오베르>, <오베르 근처의 평원〉과 같은 작품들을 보면 이미 추수가 끝난 밀밭이 그려져 있다. 이는 〈까마귀 나는 밀밭〉이 마지막 작품이 아님을 방증한다”(라영환, p.59)
실제로 그 시기에 그는 미완성 그림 두 점, 곧 ‘나무 뿌리’와 ‘오베르의 농촌 풍경’을 작업하고 있었습니다(Bailey, p.144). 그러므로 마지막 작품은 ‘까마귀 나는 밀밭’이 아니라 ‘나무 뿌리’와 ‘오베르의 농촌 풍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흐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린 이후로도 여섯 점 또는 여덞 점을 더 그렸습니다(Edward, p.116)
고흐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어떤 의도로 그렸을까요?
고흐는 아무런 의도없이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징을 볼 줄 알았기 때문에 사물에서 영원한 사명과 사물에 깃든 복음을 이해하였습니다. 그의 예술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새로운 상징을 찾았다는 데 있습니다(Nigg, p.131).
상징은 의식의 차원을 벗어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해줍니다(Eliade, p.189).
에른스트 카시레르(Ernst. Cassir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어의 세계와 나란히 독자적인 의미와 구조를 갖는 또 다른 인간 세계가 있다. 담론의 세계 저편에,말의 상징 세계 저편에 또 다른 상징적인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미술의 세계다.”(Fuchs, p.26)
어느 예술가든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상징화합니다.
아마추어 예술가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뻔한 상징을 사용한다면, 위대한 예술가는 사물을 상징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부여합니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은 늘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Read, p.72).
예술은 상징이 춤추는 놀이터입니다(Booth, p.115).
고흐는 까마귀 나는 밀밭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을까요?
누구라도 뻔하게 짐작할 수 있는 의미를 담았을까요?
까마귀는 죽음을 뜻하고,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은 검푸른 하늘은 고흐의 우울함을 표현했으며, 세 갈래 길은 고흐의 절망을 의미한 것일까요?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고 동생 테오에게 편지했습니다.
“나는 흐린 하늘 아래 끝없이 넓은 보리밭에서 극도의 슬픔과 고독을 거침없이 표현하려고 했어. 얼마 뒤 너희도 볼 수 있을 거야. 최대한 빨리 파리의 너희에게 가져갈 생각이거든. 이 그림이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내가 시골에서 보는 건강에 좋은 것, 활력을 주는 것들을 너희에게 말해주리라는 생각이 들어.1890년 7월 10일(Gogh,김유경 옮김, p.999-1000)”
많은 사람들은 그림에서 즉각적으로 보이는 슬픔과 고독만 집중합니다.
그러나 고흐는 그 슬픔과 고독 너머에 있는 건강과 활력을 주는 것에 집중하였습니다.
사실 그는 폭풍우에서 자연의 건강한 생명력을 보았습니다.
폭풍우가 몰려 오면 만물들이 잔뜩 긴장하지만, 폭풍우는 대기를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만물에게 새로운 생명을 공급합니다(안재경, p.314).
그는 다른 사람과 달리 폭풍우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보리나주의 탄광촌에서 복음 전도사로 지낼 때 머물렀던 빵집 주인은 고흐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아주 무더웠던 어느 날, 갑자기 격렬한 폭풍우가 몰아쳤지요. 그 친구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바깥 들판에 나가 서서는 하느님의 위대한 경이로움을 바라보았어요. 그리고는 아주 흠빽 젖어서 돌아왔지요. (Edward, P.117)
그는 1877년 7월 테오에게 편지했습니다.
“역경과 싸워야 우리 가슴 속에서 내면의 힘이 길러져. 그 용기는 생존싸움으로 더욱 강해지지-인간은 폭풍우 속에서 자라나거든. 우리가 끊임없이 그런 마음-생명이 거기에서 드러나므로-을 좋은 것, 소박한 것으로서 하느님 안에 풍요로움을 가지려 노력하고, 회복을 위해 애쓰고, 더욱 단단해지고, 하느님과 인간들 눈 앞에 좋은 양심을 지니려 명심하도록 애쓴다면 말이야”(Gogh, 김유경 옮김 p.173)
“이곳은 지금 궂으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날씨가 펼쳐지고 있다. 비바람과 폭풍우는 대단한 분위기를 자아내지 그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이다.”(편지 232)(Edward, p.118)
고흐는 폭풍우가 칠 때면 밖으로 나갔고, 실제로 그림도 그렸다.
“이번 주 내내 바람이 많이 불고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그 광경을 보려고 헤베닝겐에 여러 차례 갔는데, 거기서 작은 바다 그림 두 점을 그렸다.”(Gogh,신성림 옮김, p.70).
고흐는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까마귀 떼 사이로 걷는 사람의 엄숙한 분위기를 더 좋아했습니다(Edward, p.121)
1877년 1월 21일 그는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 교회 위를 날아다니는 까마귀 떼를 보았어. 이제 곧 봄이 오겠지. 종달새도 돌아올 것이고. “하나님은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할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처럼 하나님은 이 땅을 새롭게 하실거야 그리고 그 하나님은 사람의 몸과 마음도 새롭게 하실 것이고. (라영환, p.66)
반 고흐는 까마귀를 봄과 연결시켰으며,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과 새로움을 뜻합니다.
고흐는 곧 추수하게 될 밀밭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는 그림의 그림의 2/3를 생명으로 출렁거리는 밀밭으로 채웠습니다.
그는 밀의 생명을 인간 삶에 비유했습니다.
그는 여동생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온갖 일들을 생각할 때 , 밀밭에 나가 바라보는 것 말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밀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와도 같다 빵을 먹고 사는 우리도 어느 정도 밀과 비슷한 데가 있지 않니? 적어도 우리는 자기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식물처럼 , 말하자면 우리 상상력이 이끄는 대로 그냥 맡 긴 채로 자라나서 , 충분히 무르익으면 바로 그 밀처럼 수확되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빌헬미나에게 보낸 편지 13)(Edward, p.130).
인문학자 고병권은 고흐는 죽을 수는 있지만 자살할 수는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그는 죽을 수는 있지만 자살할 수는 없다! 아니 심연에 뛰어들며 생을 마감할 수는 있지만, 밀밭 위에 까마귀들을 한 마리씩 그려 넣은 뒤 총알을 장전하고는 자신을 겨누어 죽을 수는 없다.”(고병권, E-book)
에드워드는 말하기를 ‘고흐는 태양과 비바람과 폭풍우 아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땅과 피조물들의 잃어버린 복음을 재발견하고자 했다’고 하였습니다(Edward, p.123-4).
Erickson Kathleen P. , At Eternity’s Gate : The Spiritual Vision of Vincent Van Gogh(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 안진이 옮김, 청림출판, 2008
Derek Fell, Van Gogh’s Women, His Love Affairs And Journey Into Madness(반고흐, 사랑과 광기의 나날), 최일성 옮김, 세미콜론, 2007.
Guzzoni Mariella, ‘Vincent’s Books’(빈센트가 사랑한 책) 김한영 옮김, 이유출판, 2020년
Steven Naifeh and Gregory White Smith, Van Gogh : The Life(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 최준영 옮김, 민음사, 2016.
Bailey Martin, The Sunflowers are Mine(반 고흐의 태양, 해바라기), 박찬원 옮김, 아트북스, 2016
Edward Cliff, The Shoes of Van Gogh, A Crossroad Book, 2016.
Nigg Walter, Vincent van Gogh Der Blick in die Sonne(빈센트 반 고흐, 태양을 보다), 윤선아 옮김, 분도출판사, 2011.
Eliade Mircea, Symbolism the Sacred and the Arts(상징, 신성, 예술) 박규태 옮김, 서광사, 1977
Fuchs Eric, Faire voir l'invisible(신학으로 그림보기), 박건택 옮김, 도서출판 솔로몬, 1990
Read Herbert, The Meaning of Art(예술의 의미), 임산 옮김, 에코리브르, 2006.
Booth Eric, The Everyday Work of Art(일상, 그 매혹적인 에술), 강주헌 옮김, 에코의 서재, 2009
Vincent Van Gogh, Letters De Vincent Van Gogh(고흐 영혼의 편지), 김유경 옮김, 동서문화사, 2019
안재경, 고흐의 하나님, 홍성사, 2021년
Vincent Van Gogh,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옮김, 위즈덤하우스, 2008
라영환, 반 고흐, 꿈을 그리다, 피톤치드, 2020년
고병권, 철학자와 하녀 E-book, 메디치미디어,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