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열 므나 비유가 나옵니다.
열 므나 비유는 달란트 비유와 공통점이 많아서 종종 같은 비유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대학의 오브리 테일러(Aubrey Taylor)교수는 우리의 생각을 뒤집는 독특한 해석을 합니다.
오브리 테일러 교수는 성서 역사와 지리학을 사용하여 성경을 해석합니다.
오브리 테일러 교수의 해석을 좋아하지 않는 분도 계시지만, 이런 식의 해석도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죠이북스에서 출간한 Lexham 성경 지리 주석(사복음서)에 근거하였습니다.
열 므나 비유는 달란트 비유와 달리 비유의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배경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9장 12절에 보면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서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라고 합니다.
이 본문은 역사적 사실을 근거한 것으로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왕위를 받기 위해 로마로 간 이야기에 근거합니다(Jeremias p.55).
헤롯의 뒤를 이은 아켈라오는 어느 유월절 기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반란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약 3,000명의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였습니다(Josephus, p.177).
그는 정치적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하여 로마 황제로부터 정식 왕위를 받으려고 로마로 갑니다.
그러자 유대인들도 아켈라오의 잔혹성과 경제적 억압을 알려서 그가 왕위를 받지 못하도록 로마로 사절단을 보냅니다(눅19:14).
그러나 아켈라오는 왕은 아니지만 분봉왕이라는 직함을 얻어서 돌아와 유대인들을 계속하여 탄압하고 살해하였습니다(눅19:27).
예수님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런 역사적 정황에 근거를 두고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지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상황에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켈라오가 유월절에 3,000명을 학살한 사건을 연상하기에 충분합니다.
따라서 아무런 역사적 정황이나, 지리적 배경 없이 달랑 비유로만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고 오브리 테일러 교수는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 경제관념은 자본주의가 정착한 오늘날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이익을 많이 얻는 것을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자본주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는 철저하게 농경 사회였고, 모든 재화를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였습니다.
사회 구성원 중 누구의 몫이 커지면, 다른 사람의 몫이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이나 부정직, 불공평은 큰 죄입니다.
고리 대금업은 비난받아 마땅한 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고 하였습니다(눅6:35).
기독교에서도 이자를 받고 돈을 꾸어주는 것을 인정한 것은 종교개혁가 칼빈(Calvin)부터 의해서입니다.
그전까지, 이자 놀이하는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이자의 정당성은 도시 자본주의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막스 베버는 칼빈의 사상이 자본주의를 부흥시키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도 고리대금업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 다른 사람의 집과 재산을 빼앗고, 채무자와 그 가족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선지자들은 그들을 비난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열 므나를 받은 종들이 이익을 남겼다는 것은 곧 공동체보다는 주인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마치 강도처럼 채무자를 쉴 새 없이 괴롭히며 위협하였을 것입니다.
아켈라오 같은 악한 왕은 이러한 종들을 칭찬하였을 것이 당연합니다.
비유에서도 밝혔듯이 아켈라오는 돌아와 종들을 칭찬하고, 자기를 반대한 자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눅19:27).
만일 열 므나 비유에서 왕위를 얻어 돌아오는 귀인을 예수님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은 폭력과 억압과 착취를 지지하는 아켈라오로 오해하게 됩니다.
오브리 테일러 교수는 이점에 인식하고 열 므나 비유는 전혀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세 번째 종,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가 이자 없이 돌려준 종에게 주목합니다.
그는 다른 종들과 달리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도덕한 체계와 권력에 저항하되, 지혜롭게 하였습니다.
그는 주인의 의도에 비협조적이었지만, 주인의 권위를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런 이익을 거두지 않고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주인은 달란트 비유와 달리 세 번째 종을 책망하긴 하지만, 벌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맡은 돈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 당시 사회관습과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악한 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힘이 없지만 올바른 저항 방법을 찾아낸 종을 그 지도자(아켈라오)와 대조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 사상과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비전은 철저히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원수를 멸하고 복수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메시아로 추앙받는 예수님께서 그들이 가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잘못된 비전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바뀐들 폭력과 불공평의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폭력과 착취를 기반으로 한 왕국 개념 즉, 아켈라오가 다스렸던 나라나, 복수를 꿈꾸는 유대인들이 꿈꾸었던 나라를 거부하고,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를 선언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왕(주인)과 지혜롭게 처신한 세 번째 종을 대조하면서, 억압과 착취의 경제체제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악한 왕의 밑에 있는 종이지만, 왕보다는 공동체를 생각하고, 약한 자를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치고 평화를 상징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다가오자 우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19:42).
여러분은 오브리 테일러 교수의 해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했던 전통적인 해석과 전혀 다른 해석이기에 당황스러운 점도 있지만, 이 비유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필요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Jeremias Joachim, Die Gleichnisse Jesu(예수의 비유), 허혁 옮김, 분도출판사, 1988
Josephus, The Antiquities of the Jews III(유대전쟁사), 김지찬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12
Taylor L. Aubrey, ‘The Historical Basis of the Parable of the Pounds’, Lexham Geographic Commentary on the Gospel(Lexham 성경지리주석 사복음서), 김태곤 옮김, 죠이북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