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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n 09. 2022

우리는 지금까지 과부의 두 렙돈을 오해했다.

많은 목회자가 헌금 설교를 할 때 쉽게 예로 드는 이야기가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 이야기입니다.

초대 교부였던 놀라의 파울리누스(Meropius Pontius Paulinus)는 이 본문에서 과부가 하늘의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여인은 오로지 다가오는 세상만을 생각했고, 천상 보화를 열망한 나머지 지니고 있는 모든 것, 땅에서 왔다가 땅으로 돌아가고 말 것을 송두리째 봉헌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주님께 돌려드립시다. 그분에게서 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전 존재는 그분께 달려 있습니다. 모든 가난한 사람 안에서 받으시는 분께 내드립시다. 기꺼이 드리자는 말씀입니다.”(Oden ed, p.252)


 교부들만 그렇게 해석한 것은 아닙니다.

알프레드 에더스하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격려의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다. 그녀는 이미 믿음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상의 약속도 제시하지 않으셨다. 그녀의 상급은 하늘에 있었기 때문이다.”(Edersheim, p.96)


국제신대 최승락 교수도 비슷하게 해석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무엇이 과연 큰가(big) 보다 무엇이 진정으로 위대한가(great)를 묻는 법을 배운다.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은 결코 크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위대하다. 부자들의 헌금처럼 그 액수가 크기는 하지만 실상은 자투리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비 전부와 더불어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맡기는 위대한 믿음의 표현이다. 이런 위대한 신앙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최승락, P.105)

엘리야 시대 사렙다 과부는 한 줌 곡식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해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왕상17:8-15).

그게 마지막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나 배고프니 마지막 떡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요구입니다.

인간이라면 이래선 안 됩니다.

그러나 엘리야에겐 다른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순종을 계기로 그녀에게 풍성한 축복 즉 밀가루와 기름이 차고 넘쳐나게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의 과부는 마지막 생활비를 예루살렘 성전에 바쳤습니다.

그 마지막 생활비는 두 렙돈입니다.

학자들마다 조금씩 추정치가 다르긴 하지만, ‘성경 속의 생활풍습’을 연구한 제임스 프리맨은 헬라어의 렙돈은 그리스의 가장 작은 단위의 동전으로서 동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것의 가치는 1/8 앗사리온이며, 따라서 1센트의 약 1/15의 가치입니다(Freeman, p.147).

누가는 ‘몹시 가난한’, ‘아무것도 없는 궁핍한’ 과부로 표현하기 위해 신약성경에 딱 한 번 사용된 페니크라(penichra, 가난한)를 사용하였습니다(Morris, p.422).


이 과부는 마지막 생활비를 성전에 바친 후 어떻게 살까요?

과부는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까요?

엘리야는 마지막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는 과부에게 엄청난 복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예수님은 그저 말로 칭찬만 하였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21:3-4)

뭐! 더 없습니까?

그녀에게 생활비를 보태 주었다거나, 제자들을 시켜서 그녀를 도와주었다거나, 복을 베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저는 예수님께서 설마 그녀가 마지막 생활비 전부를 바쳤는데 모른 척 외면하지 않았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런 뒷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누가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의 의도를 연구하려면 앞뒤 구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Marshall, p.519).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누가가 복음서를 쓸 당시에는 장과 절을 구분하지 않고 썼습니다.

누가복음 20장 마지막 절은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눅20:46-47)

예수님은 과부의 가산을 착취하는 서기관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리고 과부의 헌금 바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다음은 성전을 무너뜨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눅21:5-6)

데이빗 갈란드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취약한 과부들을 수탈함으로써 자기 재산을 불리는 사람들 혹은 그런 과부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크게 타격을 가하신다’고 하였습니다.(Garland, p.907)


김득중 교수는 앞에선 서기관과 과부를 비교하고, 여기서는 부자와 과부를 대조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약하디 약한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종교 지도자들과, 약한 과부를 돕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뽐내기 위하여 많은 돈을 헌금하는 부자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생활비 전부를 바친 과부를 대조합니다(김득중, p.391).


그러므로 조엘 그린 교수는 예수님의 말씀은 칭찬도 포함하긴 했겠지만, 오히려 약한 과부의 마지막 동전까지 집어삼키는 종교 시스템과 지도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과부의 모습을 보면서 탄식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는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 문제로 종교 지도자들을 고발했던 것처럼, 이제는 과부의 생계비를 삼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종교 시스템의 비극적 모습을 탄식한다. 결코 누가는 예수가 과부의 행위에서 모범적인 또는 칭송받을 만한 모습을 찾았다는 식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종교 시스템이 이런 사람들을 돌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참고 행 6:1-6) 어떻게 이렇게 궁핍한 자들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예수의 사명은 이 과부를 포함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지, 가난한 자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Green, p.912).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시면서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약자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성전의 십일조는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돌보는 데 쓰도록 하였습니다(신14:29,26:12-13).

이스라엘의 재판관은 반드시 약한 자들을 위하여 판결해야 했습니다(신24:17,27:19)

가난한 자를 없게 하려고 희년과 안식년 제도를 두었습니다.

과부를 토색하고 고아를 약탈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하였습니다(사10:2).


그러나 예수님 당시 종교 시스템과 종교 지도자들은 약한 자들을 수탈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헌물하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쳐서 과부의 마지막 동전까지 바치도록 가르쳤습니다.

미쉬나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성전에는 13개의 헌금함이 있어서, 각종 명목으로 헌금을 거뒀다고 하였습니다(Bock, p.1013).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받기를 좋아했고, 가난한 자들의 헌금을 받아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했습니다(눅20:46-47).

헌금하면 복 받는다는 식의 기복신앙을 가르쳐서 예루살렘 성전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호화롭게 치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을 보면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법을 시행하여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야 마땅한 데, 오히려 강도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인데, 오히려 불의를 저지르는 본부가 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라고 탈을 쓴 악한 자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잘못된 메시지로 순진한 백성의 헌금을 갹출하고, 그것도 모라자 성전세와 온갖 세금을 받는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선지자적 심판을 선언하였습니다(Green, p.913). 


과부의 두 렙돈 사건은 단순히 하나님께 헌금하는 아름다운 과부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가는 과부가 어떤 마음으로 드렸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패한 종교 시스템 속에 착취당하는 한 과부의 헌신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이야말로 무너져야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패하고 타락한 성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헌금을 가르치고 강요하는 종교 시스템을 결코 옹호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시행하여 약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제대로 된 하나님의 성전이 다시 세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하셨습니다.


참고도서

Bock L. Darrell,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LukeII(베이커주석 누가복음), 신지철 옮김, 부흥과 개혁사, 2017

Edersheim Alfred, The Life & Times of Jesus The Messiah(메시아 4. 십자가와 면류관), 황영철,김태곤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12.

Freeman M. James, Manners and Customs of the Bible(성경 속의 생활풍속 따라잡기), 남송현 옮김, 아가페, 1998

Garland E. David, Zondervan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존더반 신약주석 강해로 푸는 누가복음), 정옥배 옮김, 도서출판 디모데, 2018.

Green B. Joel, The Gospel of Luke(NICNT 누가복음), 강대훈 옮김, 부흥과 개혁사, 2020

Mark(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III 마르코복음서), 최원오 옮김, 분도출판사, 2017.

Marshall I.Howard, International Biblical Commentary Luke(국제성서주석 누가복음), 강요섭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96.

Morris Le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틴델신약주석 시리즈 3. 누가복음), 이정석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Oden C. Thomas &Christopher A. Hall, Ancient Christian Commentary on Scripture New Testament III 

김득중, 성서주석 누가복음 II, 대한기독교서회, 1993.

최승락, ‘두 렙돈 이야기의 진짜 뜻은’(그말씀 2003년 7월호), 두란노, 2003

https://www.youtube.com/watch?v=ZbTT7zAgv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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