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게 너무 많군요"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황금가지(2009)

by 로시


누군가 책을 갖고있다는 신고가 들어온다. 출동한다. 기술의 발달로 집은 타지 않게 되었다. 책이 있는 곳에 방화수들은 신나게 불을 쏴댄다. 활활 탄다. 집주인은 보물을 강탈당한 듯 망연자실하게 지켜본다. 오늘도 방화수의 역할을, 행복을 수호하기 위한 임무를 마쳤다.

주인공 몬태그는 방화수이다. 책을 불태우는 일을 한다. 책은 악의 근원이다. 즐겁지 않은 생각들을 불러 일으켜 사람들에게 불안과 우울을 심기 때문이다. 행복은 정확히 그 반대 지점에 있고, 사람들은 책을 두려워하고 금기시한다. 즐겁고 행복한 삶을 위한 필수 조건은 1. 사방의 벽을 채운 TV, 2. 24시간 라디오가 나오는 이어폰. 언제나 즐거울 수 있는데 누가 이 행복을 마다하겠어?


레이 브래드버리가 1953년에 쓴 『화씨 451』은 책이 금지된 미래의 세상을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제목의 '화씨 451'은 책이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로 붙여졌다. (그런데 실은 섭씨 451도쯤 되어야 책이 불탄다고 한다. 작가의 미스테잌) 뛰어난 상상력과 통찰력으로 고전 반열에 올랐으며 여전히, 아니 오히려 지금,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되었다.


책이 쓰여진 1950년대 미국은 어땠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과의 관계 속에서 긴장감이 극에 달한 냉전시대로 대한민국에서 '빨갱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보수주의가 팽배했다고 한다. 실제 공산주의 사상으로 여겨진 책들은 공개적으로 화형식을 치뤘을 정도라고 하니 방화수는 실재했던 것이다. 또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쟁으로 얻게 된 거대한 자본을 등에 업고 컬러TV와 상업방송이 등장하며 '바보상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 전쟁의 공포에 시달렸던 사람들에게 걱정도 불안도 없이 24시간 뇌를 빼놓고 즐길 수 있는 TV 방송은 얼마나 달콤하고 안락했을까.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코앞에 닥친 문제와 전쟁을 알지 못한채 어젯밤 시청한 TV 프로그램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은 레이 브래드버리에게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재앙이었던 것 같다.


"광범위한 영향력, 광범위한 대중들을 상대로. 그 때문에 모든 것은 갈수록 단순해졌네. 한때는 책이란 것도 이곳저곳 모든 사람들에게 대접받았지. 경제적인 부담이 적기도 하고. 세상은 아직 여러 모로 여유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갈수록 인구가 늘고, 대중의 규모도 커지고, 따라서 대중매체도 변화하기 시작했네. 영화와 라디오, 텔레비전, 잡지, 그리고 책들이 점점 단순하고 말초적으로 일회용 비슷하게 전락하기 시작했네.
잡지? 칼럼 하나, 문장 두 줄, 됐어, 한 줄 짜리 헤드라인, 끝! 그러고는 허공으로 죄다 사라져버리는 거야. 이기적인 출판업자들의 손이 결국은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망가뜨려놓는 거지. 방송인들? 재미없는 건 죄다 내팽개쳐 버리는 거야. '왜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그러면서
학교 교육도 단순해져 갔지. 규율은 단순해지고 철학과 역사와 언어는 비참하게 몰락하고 영어의 철자법은 갈수록 변질되어 갔지. 마침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탈바꿈했네. 인생은 말초적이고 단순한 것으로, 일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으로,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후딱 일을 끝내고나면 그때부터 마냥 놀고 즐기는 시간이 시작되는 거지. 단추만 누르면, 스위치만 잡아당기면 나사만 조이면 그만인데 그 밖에 뭘 더 배우고 일을 한단 말야?" (93쪽)


매체는 이용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따라간다. 단순하고 말초적인 쾌락, 그 욕망을 공략하며 점점 더 늪처럼 사람들을 헤어나올 수 없게 한다. SNS, 숏폼, 각종 자극적인 영상들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가 이 구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또 하나의 유명한 디스토피아 소설『1984(조지 오웰)』는 국가가 정보를 전면 통제함으로써 단일한 모습의 시민을 길러낸다. 하지만 브래드버리는 책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책을 배척하고 없애기 시작하여 결국 구분할 수 없는 잿빛 인간들을 만들어낸다. (모모의 회색 인간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우리 전부가 똑같은 인간이 되어야 했거든. 헌법에도 나와 있듯 사람들은 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는 거지. 그리고 또 사람들은 전부 똑같은 인간이 되도록 길들여지지. 우린 모두 서로의 거울이야. 그렇게 되면 행복해지는 거지. (...) 열등한 인간이 된다는 두려움, 그 타당하고 정당한 두려움에 초점을 맞춘 거지." (99쪽)


이 책을 읽을수록 브래드버리가 말하고자 한 것이 검열의 위험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단순하고 말초적인 쾌락만을 좇는 내재된 본성과 욕망을 경계하라는 것은 아닐까. 지성과 반지성인을 이분화하여 반대 세력의 제거를 해결책으로 여기는 파버 교수나 그레인저 일당 역시 찝찝함으로 남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 그리고 사람이 죽어서 남기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하게 하는 그 지점은 모든 문학이 던지는 물음이고 끝없이 다른 형태의 전쟁을 반복하는 역사 앞에 놓인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환대는 사회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