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블리치펠트의 영화 <어글리 시스터(2025)>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샤바 아이샤바 얼마나 울었을까
샤바샤바 아이샤바 ( )
마지막 구절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릴 적 쎄쎄쎄의 일종으로 했던 놀이.
신데렐라는 너무 가엾었고 착하고 아름다운 신데렐라는 마법의 도움을 받아 왕자님과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 권선징악. 착하고 아름답다면 왕자님이라는 마법같은 미래가 기다린다.
하늘색 드레스와 반짝거리는 유리구두가 여자아이들에게 심은 환상이다.
신데렐라는 아름다운 동화인가.
19세기 그림형제의 버전에서 신데렐라 이야기는 무척이나 기괴하다. 계모의 두 딸은 유리구두의 주인을 찾는 왕자에게 간택되고자 유리구두에 맞춰 발가락과 발꿈치를 자른다. 다른 어떤 선택지도 고려하지 않는, 맹목적이고 유일한 욕망의 결과이다.
그래서 에밀리 블리치펠트 감독은 묻는다. 이 이야기의 핵심이 정말 권선징악인가. 자신을 파괴시킬만큼 내몰린 여성들의 선택이 정말 그들만의 잘못인가.
스포주의
신데렐라의 아버지와 엘비라, 알마의 어머니가 재혼하며 두 가정이 합쳐진다. 결혼식 당일 밤, 화기애해한 분위기 속에 저녁식사를 하던 중 아버지가 갑작스런 심장마비 증세를 보이며 죽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신데렐라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요구하지만 재혼한 남편이 땡전 한 푼 없음을 알게 된 계모는 딸들의 결혼이 먼저라며 장례식을 잠정적으로 미룬다. 신데렐라는 분노하지만 결정권이 없었고, 마침 왕궁의 무도회에 엘비라와 함께 초대받으며 무도회를 준비한다.
엘비라는 왕자님의 시가 쓰인 책 한 권만을 끼고 다니며 왕자님과의 사랑을 꿈꾸는 다소 푼수같고 순진한 소녀다. 아름다운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며 왕자님 눈에 들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한다. 교정기를 빼고 구부러진 코를 피는 수술을 하며 온갖 모욕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무도회의 주연이 되기 위한 춤을 연습한다.
말 그대로 각고의 노력 끝에 아름다워진 엘비라. 아름답고 우아한 태생이 귀족인 신데렐라는 무도회에 나오지 못하게 방해한 후, 아름다워진 자신을 당당히 뽐내며 무도회에 온 남성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고대하던 왕자님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춤을 춘다.
그것도 아주 잠시, 마법의 힘으로 아름답게 꾸민 신데렐라가 등장하자마자 왕자의 관심을 빼앗긴 후 어머니의 빠른 태세전환에 결혼시장에 팔려 나가듯 원치도 않는 온갖 남성들과 춤을 춘다. 분노에 찬 엘비라는 신데렐라를 죽이려다가 왕자가 주인을 찾던 신발을 보며 자신의 발을 신발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 발가락을 자른다.
그래서 이게 뭐가 문제냐고?엘비라가 미친 게 문제이지. 근데 엘비라 역할을 맡은 배우 가슴이 제법 크던데 몸매가 보기 좋던데. 성기도 제법 그대로 나오고, 꽤나 야하면서 잔인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이 영화로 무슨 말을 더 할 거냐고 묻는다면
당신이 본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라고 하고 싶다.
오직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으로 결혼시장에 잘 팔리는 것만이 '귀족' 계급의 여성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삶이다. 나이가 많은 여자는 젊은 여자를 아름답도록 가르치고, 젊은 여자들은 아기새처럼 졸졸 좇으며 아름다움만을 꿈꾼다.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아"라며 다이어트를 위해 촌충 알을 건네는 나이든 여성과 그걸 감격스럽게 받아든 젊은 여성. 평가받는 재능이라곤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눈에 띄게 춤을 추는 것, 한껏 꾸민 어머니 여성과 딸 여성은 인형처럼, 구경거리처럼 무도회에 한 쌍씩 등장하여 마치 가축의 경매장을 연상케하듯 키와 식성, 취미 등의 프로필이 읊어진다. 젊고 늙은 남성들은 눈과 입으로 여성들을 마음껏 유린한다.
쌍커풀은 이미 수술이 아니라 시술이 된 시대. 울쎄라, 라주란(?) 등은 기본이 된 시대. 퍼스널 컬러, 몸매별 옷차림, 성형 화장 등등 살과 뼈를 깎는 고통은 점점 더 정교하고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시대에 엘비라의 겁에 질린 눈빛과 그녀가 기꺼이 감내하는 고통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보다 촌충이 들어선 이후 끊임없이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는 엘비라의 건강이 아닌 주변의 시선에 대한 염려를 일으킬 뿐이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에겐 그만큼 익숙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바디 호러와 다큐라는 장르가 한 끗 차이라니.
엘비라의 동생 알마는 언니의 고통을 알고 말리지만 그 이상은 신경쓰지 않는다. 작품에서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말을 돌본다. 아름다움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하고싶은 걸 할 뿐이다. 어머니도 알마는 관심이 없다.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는 듯 하다.
하지만 알마는 엘비라가 모든 걸 잃고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할 때 기꺼이 손을 내민다. 무시무시한 촌충을 직접 두 손으로 끄집어내고 몸이 성치 않은 엘비라를 이끌어 함께 도주한다. 보이지 않는 장면들에서 힘과 용기와 자립심을 기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언니를 기꺼이 돕는다.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함께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아름다움만이 유일한 가치이자 재능이던 어머니는 딸이 도망치는 걸 보면서도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길인마냥 남성의 성기를 애무한다.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의 본질이자 종착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호흡의 조절이 다소 아쉬웠지만 곱씹을수록 좋아지는 작품이다. 주요 등장인물 외에도 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은 아름다움밖에 모르는 폭력적인 사회의 피해자들이다. 고통을 과업으로 가진 그녀들은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포장지에 갇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인형으로 존재한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도 반기를 들지도 않고, 자신을 향한 여성들과 남성들의 모욕을 수용하고 내면화한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이건 지금 더하면 더했지 절대 과장이 아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와 권력 구조를 여성과 아름다움에 적용시킬 수 있다면, 이 무거운 굴레를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말과 생각들이라는 폭력을 지양해야 함에 공감할 것이다. 그런 소망을 전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