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혁. 『2분 30초 안에 음료가 나가지 않으면 생기는 일』
평소 에세이는 거의 읽지 않는다. 나 하나만으로도 살아가는 게 벅찬지 내 곁에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왠지 부담이 된다. 그나마 읽는 에세이들은 최근 읽은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박완서)』처럼 이미 내 취향으로 검증한 작가들이 쓴 것이고, 소설이나 시와 다른 글맛을 느끼기 위해 또 그 작가의 정수를 알기 위해 읽는 것들이다. 그러니 이 글의 대상인 『2분 30초 안에 음료가 나가지 않으면 생기는 일(이성혁)』책과 같이 젊은, 전업 작가가 아닌, 완전히 개인의 일상 경험이 담긴, 독립 출판물의 에세이 같은 책은 정말 평소에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종류인 것이다. 무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감정적 부담이 크다는 그런 취향의 문제.
근데 어쩌다 읽게 되었냐면 옆동네 도서관에서 직장인 독서모임 강좌로 서평쓰기를 한다길래 신청했는데, 신청하고 보니 강사로 오실 작가님의 책을 읽어 오는 것이 숙제였다. '앗, 이런 글 오랜만이군.' 약간의 부담과 긴장을 갖고 읽기 시작했다. 읽자마자 무섭도록 빠져들었고, 감동의 물결이었다. 라는 건 거짓말이다. 그래도 문장은 너무 과한 꾸밈이 없어 괜찮았고, 어려운 내용이 없어 술술 읽히는 점이 좋다 라는 게 이 책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다. 그렇게 숙제를 마쳤다.
독서모임에는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오셨다. 새삼 궁금했다. 나보다 훨씬 더 멀게 느껴질 젊은 시절의 이야기인데 어떻게 읽으셨을까?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쓰신 내 또래의 작가님은 강연을 많이 하셨어서 그런지 편안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모임을 이끄셨다. 제법 평이한 첫인상으로 기억했던 책은 한 분 한 분 인상깊은 구절과 감상을 나누면서 새롭게 다가왔다. 적어두고 싶을 만큼 반짝이는 문장들이 보였고, 2회차 모임이 끝났을 땐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으로 바뀌었다. 에세이 중에서는 꽤나 신기한 경험이다.
여러 번 경찰 시험에 도전한 작가님은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각오했던 시험조차 합격하지 못했을 때 노량진 생활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스타벅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고시생활을 완전히 정리한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자격이나 경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을 찾아갔다. 책 제목이 말하듯 고시생활과 스타벅스에서 일한 경험을 중심으로 쓴 이 책은 '성공'이나 '실패'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는, 현재도 통과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날짜는 정해져있는데 시간이 자꾸 간다. 정해진 시간에 갇혀있다. 시간을 뚫고 가는 길은 어렵다.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 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놓아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 …
내가 아는 것은 지금은 봄에 기다리던 여름이었다. 그렇게 내가 지나고 있는 뜨겁지만 축축한 그리고 촉촉한 것들이 다 소멸하는 이 여름은 지나간다는 것이다. 모든 게 선선한 색으로 변하는 가을이 지나면 아마도 바로 첫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140쪽)
"옛 시절에 비하면 지금 젊은이들은 정말 풍요롭고 살기 좋은 것 같아요. 도서관에서 책을 주면서 작가님 만날 기회를 준다는 건 상상도 못했거든요."
한 참가자분께서는 아들과 조카 이야기를 하며 젊은이들의 불안을 궁금해하셨다. 예전처럼 배 곯을 걱정도 없고,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지는 세상인데 누리기에도 아까울 젊은 시절에 무슨 불만과 불안이 그리 많은 것이냐고. 들으면서 나도 공감했다. 분명 따지고보면 그랬다. 청년을 지원하기 위한 나름의 정책이 있고, 웬만한 경험들은 시간과 돈을 들여 살 수 있다. 전쟁의 위험을 직접적으로 겪지 않으며 핸드폰을 붙들고 사는 대다수의 젊은이들의 답답함은 무엇일까?
그럼에도 나역시 내 안의 불안을 책망할 수는 없었다. 돈을 많이 벌진 못해도 안정적인 직업이 있고, 하고 싶은 취미 활동들을 하며 살고 있지만 내 앞에 놓여진 삶은 무겁기만 하다. 늘 무언가를 얻고 이뤄내서 나의 능력과 가치를 증명해야만 할 것 같다. 제대로 하는 것 하나 없이 '귀한' 젊음을 허비하는 것 같다. 정답은 없다면서 내가 내놓은 답은 틀렸다고, 후회할 거라고 한다.
그 때 또 다른 한 참가자 분께서 말하셨다.
"저는 젊은 날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정말 힘들었거든요. 근데 그 나이가 원래 힘든 거 같아요."
이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지, 해명해지 않아도 알아주는 마음이 감사하고 반가웠다. 그 때부터 한결 편안한 기분으로 다른 분들의 말에 귀기울일 수 있었다. 나와 다른 시간을, 내가 겪었거나 겪게 될 시간들을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책에서 나누는 경험과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정말 큰 울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알아주는 것 같았고, 남들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구나 싶어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남은 모임도 무척 기다려진다. 이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다시 보지 못할 인연들이지만 지나가고 있는 이 시간들 속에 하나의 자국으로 남아 가끔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때마다 이 책과 사람들이 전해준 온기가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