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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뱅이 Aug 24. 2020

아기를 잃은 엄마 고양이

구슬픈 울음소리




아파트 1층인 우리 집에는 작은 마당이 있다. 그 마당에는 아이들도 매일 나가 놀지만 길고양이들이 자주 놀러를 온다. 이사 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마당을 정비할 때마다 고양이들이 밤새 와서 구경을 하고 간 흔적을 볼 수 있었다. 한창 봄 텃밭을 준비할 때는 새로 심은 모종을 다 파해 쳐놔서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사람을 심하게 경계하는 고양이 한 마리가 숨죽이고 들어와 새끼 고양이 세 마리를 낳고 한동안 몸을 풀고 갔다.


그리고 올해 봄 같은 엄마 고양이가 다시 우리 집 마당에 와서 다섯 마리의 새끼 고양이를 낳고 몸을 풀고 몇 달이나 지냈다. 아주 작은 새끼 고양이들이 매일 몸집이 커지며 자라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밥도 한번 준 적 없는데 엄마 고양이는 뭘 먹고 저렇게 아기들을 키우는지 정말 궁금하기도 했다. 보송하고 작은 아기 고양이가 너무 귀여워서 다가가고 싶었지만 나를 특별히 싫어하며 나만 보면 하악질을 하는 엄마 고양이의 눈치가 보여 가까이 가보진 못했다. 아이들은 매일 아침마다 고양이를 보려고 창가에 붙어서 구경하며 이름도 지어주었고 놀이터에서 마주치면 반가워하며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고양이라는 존재가 원래 그러하듯 고양이의 이름은 아이들에게만 유효했다.


그렇게 아기 고양이들이 제법 자라서 주니어 고양이가 되어 떠나고 한동안 우리 집 마당에는 고양이들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파트 단지인 곳곳에는 고양이들이 있었고 아이들은 고양이 이름을 부르며 쫓아다녔다.



마지막으로 마당에서 만난 주니어 고양이들






며칠 전 아파트 단지 안 어딘가에서 또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것인지 작은 새끼 고양이들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아마도 우리 집 근처 어딘가에서 낳은 것 같았지만 우리 집 마당은 아니었다. 그러다 어제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집 마당에 들어왔다. 몸집이 아주 작고 하얀 새끼 고양이였다. 그런데 걷는 모양새도 힘이 없어 보이고 털도 푸석해 보이는 것이 어디가 아픈가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아 '그래 쉬다 가라' 하며 마음을 쓰지 않았다.


오늘 아침 환기를 하려고 베란다로 나가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을 여는데 마당에 어제의 그 고양이가 힘없이 옆으로 다리를 뻗고 누워 있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죽은 것이다. 뒤늦게 아이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동네 누나들이 간식을 줘도 먹지 않고,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더라며 원래 아픈 고양이였다고 했다. 저 작은 생명체가 숨을 다했다는 것이 너무 가여웠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나도 출근 준비를 하는 사이 밖에서 고양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내다보니 마당 바깥에서 큰 고양이 두 마리가 울고 있었다. 등을 보이며 마당의 작은 나무문을 막고서 울고 있는 고양이는 지난봄 우리 집에 와서 몸을 풀었던 그 엄마 고양이였다. 순간 마음이 너무 이상했다. 어제 내가 뭔가를 했어야 했나 후회도 되었다. 두 마리의 고양이는 한참을 울면서 그 자리에 있었다. 운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어찌나 슬프게 우는지 나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다른 한 마리는 잘 모르지만 아빠 고양이지 않았을까?


구슬픈 울음 소리. 일부러 초점이 나간 영상을 올린다.





고양이는 가엽지만 나는 우선 마당에 누워있는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난감했다. 고양이를 묻어줘야 하나, 이 땡볕에 어디 가서 땅을 파야하지, 단지 안에 묻을 만한 곳이 있나, 얼마나 깊이 파야할까, 함부로 만지면 안 되려나, 엄마 고양이가 화를 낼까, 온갖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러다 먼저 아파트 관리소에 물어보기로 했다. 전화를 하니 장소와 상태를 묻고는 사람을 보낼 테니 그냥 두라며 걱정 말라고 했다. 안도감과 함께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다. 관리소에서는 흔한 민원전화 중 하나에 불과했고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았다.


퇴근하고 돌아오니 마당에 누워있던 고양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관리소에서 정리를 한 것 같았다. 나는 길고양이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저 함께 이 지구를 공유하는 같은 생명체로써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 공생관계로 살아갈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은 동물이라 할지라도 절절할 것이다. 나에게 모질게 하악질을 하며 새끼들을 지키던 엄마 고양이는 어디서 새끼를 낳았던 것일까? 그 아픈 고양이를 우리 집 마당에서 낳았더라면 좀 달랐을까? 이전에도 특별히 내가 해준 것은 없었지만 괜히 안타까운 마음에 그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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