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릴 곳을 지나쳤습니다. 걸어서 10분을 되돌아가며 예정에도 없던 ‘낯섦’을 마주쳤습니다. 애국가 3절처럼 하늘은 높았고, 구름의 방해를 받지 않은 태양은 온갖 그림자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은행잎이 수북이 쌓인 거리는 발을 내딛기 어려울 지경이었고, 옷을 반쯤 벗은 나무는 찬바람을 일으켜 나의 코끝을 간지럽혔습니다. 가을이었습니다.
세검정을 지나 산자락에 올랐더니, 이곳은 ’멀리 갈수록 낯선 곳이다‘라는 편견을 가볍게 비웃듯, 나에게 묘한 정취를 선보였습니다. 나는 놀랐습니다. 이런 정취는 관광버스에서 꾸벅 세 시간을 졸아야 만나곤 했는데, 시내버스로 몇 정거장, 벨을 누르지 못해 지나쳤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이런 낯선 곳이 있었습니다. 오후의 역광을 헤쳐가며 나는 산길을 올랐습니다. 의심스러운 풍광은 계속되었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가 지금 서울에 있는 게 맞나?’
도롱뇽 서식지를 만났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곳의 도롱뇽은 무려 ‘서울도롱뇽’입니다. ‘서울쥐’는 들어 보았지만 ‘서울도롱뇽’은 아무리 어음을 반복해 보아도 어색했습니다. 버들치와 개구리, 가재도 서식한다는 팻말을 보고, 부디 오래 살아남아 이곳에 오는 많은 이에게 ‘낯섦’을 선물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건물을 지탱했던 곳으로 보이는 여러 주춧돌이 보였습니다. ‘백사실계곡’으로 알려진 이곳은 조선 중기의 문신 ‘백사(白沙) 이항복(1556~1618)’의 별장이었다는 설과,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아지트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나는 그동안 이처럼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상의 여지를 남길 수 있는 곳에 매력을 느껴왔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나의 상상을 얹어 보았습니다. 만약 추사 김정희의 눈에 들었던 곳이라면, 이곳은 분명 보통의 아름다움만으로 가꾸어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김정희는 아름답지 않은 것을 본 것만으로도 ‘으..! 감히 내 눈에 상처를 입히다니!’라며 불평하기 십상이었기에, 그런 김정희가 디자인한 아지트 모습에 누구라도 매혹되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육각정자였던 곳으로 보이는 주춧돌 앞, 연못의 흔적을 바라보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미감을 소유한 김정희가 육각정자 위에서 풍류를 즐기며, 술잔과 붓을 번갈아 드는 모습을 상상하니 이런 대사가 들렸습니다. “난 아름다운 것만 본다. 앞으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제발 좀 가져오지 말거라!”
가을의 정취가 더해진 서울을 향한 낯선 감정은 부암동으로 걸어 내려오는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왕산 자락을 지나면서 반갑고 익숙한 풍경을 만났습니다. 저 멀리 남산을 품은 서울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보았던 모든 낯섦이 과연 이 짧은 시간 동안 느낀 것이 맞을까?’라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남부 산간지방에서 서울까지 점프해 온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른 계절의 이곳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낯섦이 필요할 때, 이곳에 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번엔, 당신과 함께 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