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면 뭐라도 쏟아내야

오늘은 그게 내 감정이었다.

술김에 글을 쓰기 전에, 이 글은 내 속을 긁어냈다 싶을 만큼 지저분할 것이다. 또 속내를 정제하지 않고 쏟아내는 글이고 싶다. 최근 몇 달은 지금부터 끄적일 생각과 걱정 위에서 어지럽게 흐르고 있다. 단 1초도 그 경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케케묵은 억울함, 불안감, 열등감 따위가 나를 강제로 앞으로 끌고 가는 중이다. 내 성장욕과 성실의 출처는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정상적 욕구가 아니라, 이미 되었어야 하는 모습이 되지 못한 괴리감이다. 내 모든 생각과 행동은 부정적인 동기에서 자랐다는 사실부터 이야기로 남긴다.

 

두괄식으로 말해야겠다. 나는 거품이다. 거품을 스스로 걷어내고 싶어 발버둥도 쳐봤는데, 평범한 수준의 발버둥은 체면 치레를 위한 겸손 정도로 치부됐다. 해명하려면 가장 연약한 곳의 속내부터 끌어내야했다. 해명 한 번에 감당해야하는 감정 소모가 너무 컸다.

고맙게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준다. 개인적인 모습도 좋게 봐주고 있지만, 살아가는 태도나 일적인 부분도 좋게 봐주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심지어 나랑은 일도 안해본 사람들마저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서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주었다. 감사한 포장이 늘어나면서 어느 순간 과대포장의 범주에 들어섰다. 내가 포장에 능한 건지, 아니면 잘하는 모습만 우연히 비춰져서인지는 몰라도 이름엔 거품이 꼈다. 사람들이 아는 나와 내가 아는 나는 점점 달라졌다. 거품을 걷어내지 않는 한 전자의 모습은 내가 아니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보다 '할 줄 알겠거니' 싶은 것들이 많아질 때 일종의 억울함도 자라났다. '사람들이 아는 나'는 진짜 내가 되어야하는 이상향이 되었다. 거품이 꺼져버린 후의 사람들의 실망감은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거품이 꺼지기 전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난 그 이상향이 되어야 했다. 달성할 수 있는진 모르겠고 일단 높은 목표치부터 주어진 사람이 되었다. 목표치가 터무니 없다는 걸 증명하기엔 준비할 게 너무 많았다. 차라리 목표치를 달성하자고 마음 먹고 애쓰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기대에 부응하려고 열심히 살았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내가 되어야 하는 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바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거품말고도 또 있었다. 거품이 나에게 억울함으로 남았다면, 그런 것과 상관없이 불안함과 열등감 때문에 열심히 살기도 한다. 불안함은 외로움과 무능력이라는 두려움에서 온다. 내가 말하는 외로움과 무능력은 결을 같이 한다. 무능력하면 필요가 없다. 필요가 일찍 없어지면 오래 일할 수 없다. 손로운이란 사람은 누군가와 도움이 될 때 비로소 생기를 갖는 사람이라서, 난 오래도록 필요한 사람이어야 했다. 내 몫을 다 하는 건 당연하고, 그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해야 비로소 난 필요한 사람이 된다. 타인에게 내가 필요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나를 책임져줄 존재가 거의 없다. 나를 뺀다면 기댈 곳은 스스로가 거의 유일했다. 내가 나를 책임지려면 손로운이 오래도록 필요해야한다.

내 앞날은 내가 오롯이 책임져야한다는 걸 깨닫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서울에 집이 있는 친구들, 형제 자매가 많지 않은 친구들, 부모님의 나이가 상대적으로 어린 친구들에 비해 우리집은 풍족하지 않았다. 삼형제를 기르는 건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이 드는 일이었다. 내 부모님은 정말 위대하신 분이다. 그 많은 비용을 모두 다 지불하시고서 삼형제를 모두 훌륭하게 길러내셨다. 세 명 모두 26살을 넘기지 않고 직장을 구했고, 형은 이름을 모를 수 없는 기업에서 25살부터 일을 하면서 서른이 되기 전에 가정을 꾸렸다. 둘째는 취업 3년만에 몸값을 2배 가까이 불렸고, 동생은 일이 고되긴 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았다. 부모님은 당신들의 청춘과 재산을 아들들을 위해 탈탈 털어내셨다. 다르게 말하면, 부족할 것은 없어도 여유롭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우리는 경제적 안전망이 없었다. 경제적 안전망이 있는 친구들이 때로는 부러웠다. 나보다는 덜 열심히 살아도 되는 친구들에게 어느샌가 모순적인 열등감이 생겼다. 경제적 안전망이 없다는 사실은 첫째와 셋째에게는 큰 고민이 아니었다. 각자의 고민이야 있겠지만 생계를 고민해야할 정도는 아니었다. 둘째는 생계를 고민해야했다.

내가 몸담은 마케팅업계는 수명이 짧다. 시시각각 변하는 흐름을 잘 읽을 수 있어야하고 동시에 받아들여야 한다. 뒤처지는 순간 밀려나는 업계다. 매년 나는 느려지는데 변화는 빨라진다.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40대에 접어드는 순간 마케팅 업계에 남아있는 사람은 급속도로 줄어든다. 미래는 모르는 일이라지만 현상은 존재한다. 나의 직업 수명은 40대를 넘기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걱정해야하는 나의 생계는 40대 중후반부터다. 나의 아버지는 환갑이신 올해 정년 은퇴를 앞두고 있는데, 나는 그보다 15년 정도는 일찍 나의 2막을 준비해야한다. 이 분야에 남아있는 한 어디서 일하건 똑같았다. 인생 준비가 일러야하는 업계에 뛰어들었다. 나의 안전망은 내 몫이다. 안전망을 만들기에 광고, 마케팅 업계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보수가 넉넉하지도, 수명이 길지도 않았다. 불안할 수 밖에 없다. 반년 뒤 모습도 그려지지 않는 업계에서 내 안전망을 구축해야했다. 그러려면 나는 오래도록 필요한 사람이어야 했다. 오래도록 필요하려면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야했다. 열심히 사는 수 밖에, 끊임없이 똑똑해지는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열심히 살아야하는 이유는 일종의 억울함과 불안함, 열등감에 있다. 남들이 알고 있는 손로운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래도록 필요해야 하기 때문에, 남들에 비해 내가 가진 안전망이 튼튼하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한다. 여기에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욕심까지 더해져 내 삶을 끌고 간다. 사실 어떤 동기로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동기야 어떻든 내가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게 중요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면 스스로도 노력해야했고, 나를 둘러싼 환경도 분명히 중요하다. 모르는 걸 알아내려면 모르는 걸 충족해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다. 효율적으로 자라려면 불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성장할 수 있는 곳에 있고 싶었다.

내 첫 번째 직장은 스스로 노력한만큼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저연차에도 주어진 역할이 많았기 때문에 책임도 컸고, 배우는 것도 많았다. 문제가 있다면, 부딪혀가면서 배워야하는 것들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걸 물어볼 곳이 많지 않았다. 사수가 없는 환경에서 일을 하는 건 보호대 없이 부딪히는 것이었다. 혼나고 바보 취급을 받으면서 배운 것들은 완벽하게 이해했지만, 내가 부딪히지 않은 것은 영영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모르는지 나도 몰랐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문제들은 또 다시 바보 멍청이 취급을 받으며 해결해야한다는 사실도 스트레스였지만, 회색 지대가 영영 회색 지대로 남는 것도 큰 스트레스였다. 일을 하면서 당췌 무슨 소린지 모르겠을 때만큼은 커다란 자괴감이 들었다. 물어볼 곳이 없다는 데에서 좌절감이 들었다. 그런 좌절감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면서 극복하곤 했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성취감은 사라졌고, 좌절감만 남았었다. 그렇게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할 줄 모르는 걸 해내야 하는 시간은 끔찍했다. 하찮아보이는 것에 시간과 노력이 소비되는 건 견디기가 힘들었다. 들이는 시간에 비해 얻는 것은 거의 없었다. 무기력함이 아닌 무력감이 날 지배하곤 했다. 언제든 내가 대체될 수 있다는 걱정은 가시질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내 필요성을 증명해내야 살 것 같았다. 이때부터 스스로를 키워내야한다는 강박이 시작됐다. 나 스스로도 내가 쓸모 없어보이는 게것만큼 큰 좌절감은 맛본 적이 없었다. 그걸 견뎌내기 위해서라도 난 더 나아져야했다.

몇 년간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면서, 그 곳에서 더 이상 나아질 점을 찾지 못하고 나서야 이직을 결심했다. 내가 이직해야할 곳은 내가 할 줄 모르는 것을 해볼 수 있는 분야여야했다. 동시에 그 능력이 나중에 경제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했다. 온오프라인 미디어플래닝과 웹 퍼포먼스마케팅은 해봤지만 앱은 진행해보지 못했던 나는, 그렇게 앱 퍼포먼스 마케터가 되기로 결심했다. 인하우스부터 대행사까지, 오프라인부터 온라인까지, 웹부터 앱 퍼포먼스 마케팅까지 섭렵한 매체 깡패를 이상향으로 설정했다. 불평불만 가득했던 전 직장에 대한 실망감은 모두 버리고, 욕심을 원동력 삼아 새 직장에서 일하고 싶었다. 새 직장에서 좋은 마음을 안고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싶었다.

새 직장은 좋은 점이 많았다. 성장할 부분이 많은 회사였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였고, 전 직장보다 노동의 대가를 합당하게 받을 수 있었다. 비록 가장 원하는 회사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좋은 선택지였다. 오히려 내가 이 회사의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이전에 내가 아끼는 후배인 채OO이 '나를 못 믿겠다면 나를 뽑은 사람을 믿어라' 라고 했던 말이 와닿아서 쭉 모토로 삼았고, 문제점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 문장으로 끊임 없이 나를 채찍질하기 바빴다. 문제점을 발견하기 전까지, 이 회사에서 분명한 성장을 기대할 수 있었다.

뜻밖의 영역에서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내 직무로서 커리어를 쌓기가 어려웠다. 마련되지 않은 인프라와 의견 교류가 경직된 구조, 사수 없는 환경에서는 내 직무로서 성장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서비스 성장에 필요한 부분이 개선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간단한 조치만으로 나아질 수 있는 서비스가 다른 것에 밀려 개선되지 못했다. 개선되지 않은 서비스를 마케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해보지 않은 영역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건 정말 외로웠다. 이미 한참 전에 도입했어야 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하는 이유를 회사는 계속 알지 못했다. 에스컬레이터를 만들면 되는데 계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첫 발만 내딛는다면 나도 서비스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쉬운 길을 만들면 되는데, 어려운 길에서 탈 교통 수단을 개선하는 데에 집중하는 회사라는 걸 알게 됐고, 그제서야 그건 큰 문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회사도 나도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회사가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을 하고, 새로운 서비스보다 만들어둔 서비스를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춘다면 분명 나아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나 스스로 또 깨지고 넘어지면서 배우게 되겠지만, 성장할 수 있다면 기꺼이 넘어질 자신도 의향도 있다. 다만, 넘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끝까지 나 혼자라면 어느 순간엔 나도 주저하게 될 것이다. 같이 넘어질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 떠나게 될 것이다. 

불안함을 해소할 수 있는 능력과, 성장에 유리한 환경이 절실하다. 이미 그런 환경에 합류한 사람들을 볼 때 한편으로는 대단하다 싶으면서 한편으로는 괴롭다. 들인 노력에 비해 처한 상황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는 건 슬프다. 이 슬픔마저 성실의 원동력이 되어서 나를 뒤에서 밀고 앞에서 잡아 끈다. 지금처럼 성장하다보면 언젠간 내가 원하는 거 얻게 될 거라는 걸 알지만, 그 전까지 불안해하는 것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최대한 그 불안함을 줄이고 싶다. 내가 당면한 숙제는 성장만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빈 자리가 생기면 차오르는 불안감을 받아들이고 성장을 위한 동력으로 삼고 싶다. 

정제되지 않은 속내였다. 20대 중후반의 삶을 통틀어 나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들을 고스란히 적었다. 나는 불안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성장해야한다.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갖춰지지 않아서 또 불안하다. 그 불안함이 없어도 될 만큼 갖춰진 환경을 갖기 위해서는 내가 그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돈다.

무슨 목적으로 이 글을 썼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술을 마시면 무언가를 쏟아내야한다. 감정의 폭주든 고민이든. 오늘은 그 대상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걱정이었다. 짐처럼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것을 이렇게라도 쏟아내면서 덜어내고 싶었다. 이 글을 읽는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가끔은 내 이런 걱정을 떠올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