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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Mar 12. 2023

[공개 일기] 일요일의 시간들

2023년 3월 12일


주말 중 하루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 그래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조금 달려도 지치지 않더라고. 어제는 초록이와 용산에 다녀왔더니 너무 피곤했나 봐. 그래서 아침에 조금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했어. 보통 6시쯤 일어나서 남편 도시락을 싸는데, 온몸이 천근만근이어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겠는 거야.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다시 잤어. 눈을 떠 보니 9시가 다 된 거 있지?


거실에 나와 보니 남편은 대충 아침을 챙겨 먹고 씻으러 들어갔더라고. 내가 도시락을 안 싸 주면 하루종일 쫄쫄 굶으며 강의를 할 때가 많으니 서둘러 냉동볶음밥을 꺼내 밥을 볶았어. 한쪽 프라이팬에는 볶음밥을, 한쪽 프라이팬에는 계란프라이를 했더니 두 손이 정신이 없더라. 10분 만에 뚝딱 도시락 2개를 완성했어. 나 대단하지?


아참! 남편은 일요일에 출근하냐고? 응. 주말에 더 바쁜 사람이야. 주말에는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빠서 내가 도시락을 두 개씩이나 싸 주고 있어. 토요일은 김밥, 일요일은 볶음밥으로 말이지. 맛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도시락을 맛으로 먹지 않는데, 그냥 허기가 지니까 먹는 거래. 내 도시락은 배를 채우는 용도인 거지. 사실 나도 도시락에 정성과 사랑을 듬뿍 담지는 못하니, 남편이 그렇게 말해 주는 게 마음이 편해.


남편을 출근시킨 뒤 좀 쉬었냐고? 집에 있으면 마음이 그나마 편하니 쉬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남편을 보낸 뒤 세 아이들 밥을 각각 따로 챙겨 줬어. 애들의 기상 시간이 다르니 말이야. 한 명 밥을 챙겨 준 뒤 세탁기를 돌리고, 한 명 밥을 챙겨 준 뒤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빨래를 정리했어. 그러고 나서 나머지 한 명과 난 같이 밥을 먹었어. 내 밥은 항상 제일 나중에 챙기게 되더라고. Me first!!!  이게 나에겐 참 어려워. 특히 집에서는.


틈틈이 식탁에 앉아 책을 읽었어. 이렇게 읽는 페터 비에리 교수님의 <삶의 격>은 진도가 잘 나가지는 않지만, 큰 깨달음을 주기도 해. 사춘기 아이를 둔 나에겐 정말 특히나. <삶의 격>을 읽고 있으니 푸름이가 내 앞에 딱 앉는 거야. 마침 잘됐다 싶어서 이 책의 56~62페이지까지 읽어 주었어. 푸름이는 내가 이렇게 책의 한 부분을 읽어 주는 걸 좋아해. 이야기를 해 주는 것도 좋아하고. 책을 읽어 줬더니 가만 앉아서 듣더라고.


이 부분은 조금 특별해서 전체를 필사하며 곱씹어 보았던 내용이었어. 어떤 내용이냐면, 아이의 출산이 임박한 한 임신부가 병원에 온 거지. 의사는 제왕절개를 하지 않으면 태아의 생명과 임신부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해. 하지만 임신부는 제왕절개를 반대해. 이러한 수술을 하는 행위가 신의 섭리를 거스른다고 믿는 마을 공동체에 살고 있었던 거지. 의사는 임신부를 설득하려고 노력하지만 임신부는 꼼짝하지 않아. '자연 분만을 진행할 경우 태아가 죽고 임신부가 위험할 수 있지만 의사는 임신부의 결정을 존중한다.' VS '임신부의 결정보다는 생명이 더 소중하므로 의사의 권위로 제왕절개를 한다' 의사는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거지. 어떤 경우를 선택하든 의사는 임신부에게 감사 인사나 원망의 말을 듣게 돼.

페터 비에리 교수는 이 부분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해.


존엄성에 대한 문제를 놓고 이러한 딜레마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은 존엄성과 관련된 경험, 그리고 존엄성이 속하고 그 안에서 표현되는 삶의 형태, 이 두 가지가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이 부분을 읽으며 사춘기 아이와 부모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어. 아이가 한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나타낼지 빤히 보이는데 아이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대로 두는 게 맞는지, 아이는 반대하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아이를 이끌고 가는 게 맞는지 결정하지 못할 때가 많았거든.


이 부분을 읽어 주고 푸름이의 생각을 물어보았어. 그러면서 또 슬쩍 엄마의 양육 방식도 물어보았지. '네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게 분명해 보일 때 엄마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이렇게 구체적인 질문도 해 보았어. <삶의 격> 덕분에 아이와 철학적인 얘기와 현실적인 얘기를 다양하게 나눌 수 있었어.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글로 써 보려고.


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눈이 감긴다.... 보통 이 시간에 자냐고? 응.

10시가 되면 초록이와 거실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가. 지금 초록이도 안 자고 있냐고? 응. 거실 불을 껐더니 복도 조명을 켜 놓고 혼자 자동차 놀이를 하고 있네. 지금 나에게 다가오고 있어. 어서 노트북을 덮고 잠자리로 가자고 말이야.


푸름이는 추운 날 친구들과 밖에서 신나고 놀고 왔더니 피곤했는지 벌써 잠이 들었고, 맑음이는 학원 숙제가 밀려 있다며 이제야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고 있어.


난 이제 초록이와 잠 잘 준비를 해야겠어. 오늘은 그림책 딱 5권만 읽고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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