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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Mar 22. 2023

[공개 일기] 수요일: 칼 가는 남자

우리 집에는 벽돌같이 생긴 돌이 있어. 이 돌은 10여 년 전, 시아버지께서 사 오신 거야. 시어머니께서 우리 집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데, 칼이 너무 안 든다며 시아버지께 칼 좀 갈아 달라고 하셨거든. 그날 시아버지께서는 숫돌을 사 오셔서 직접 칼을 갈아 주셨어.


난 칼을 간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어. 안 썰리면 안 썰리는 대로 그냥 살았거든. 김밥을 썰 때 옆구리가 다 터져도 내 솜씨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하고 넘어갔었어. 어머나 근데 칼을 한 번 가니까 그냥 쓱쓱 썰리는 거야. 김밥이 그 모양 그대로 옆구리도 안 터지게 잘 썰리는 거지. 그래서 칼을 갈아서 쓰는 거구나 하고 깨달았어.


시간이 흘러 그때 시아버지께서 갈아 주신 칼은 무뎌졌어. 게으른 난 칼을 갈 생각을 안 했지. 안 썰리면 안 썰리는 대로 또 그냥 살았어. 시부모님이 우리 집에 오실 일이 없어서 계속 그대로 살았지.


근데 맑음이와 푸름이가 어느 날부터 요리를 하기 시작하면서 부엌칼을 사용하게 된 거야. 칼이 무디면 아이들의 힘으로 무언가를 썰기 더 힘들지. 그래서였는지 아이들이 숫돌에 칼을 갈아서 쓰는 거야. 놀랍지 않아? 할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인지, 돌이 신기해서 그냥 갈아보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애들은 칼이 무뎌질 만하면 갈아놓고, 칼이 무뎌질 만하면 갈아놓더라고.


푸름이는 이제 칼 가는 게 별로 재미없는지 칼을 갈지 않는데, 맑음이는 아직 칼 가는 게 재밌는지 잊지 않고 갈아 줘. 마스크를 쓰고 한 손엔 칼, 한 손엔 숫돌을 들고 욕실에 들어가서 문을 꼭 잠근 채 칼을 갈아. 문을 잠그는 이유는 혹시나 어린 초록이가 보고 호기심에 따라하면 안 되니까. 그래서 나도 맑음이가 칼을 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어.


며칠 전에도 맑음이가 칼을 갈아 줬어. 내가 칼이 조금 무뎌졌는지 김밥 끝부분이 잘 잘리지 않는다고 하니까 맑음이는 바로 행동에 들어갔어. 쓱싹쓱싹~~~~

이렇게 칼을 갈아놓은 날에는 요리할 때 칼을 조심히 다뤄. 살짝만 스쳐도 손에 상처가 나거든.


맑음이는 하나를 시작하면 깊이 들어가. 월요일에 갑자기 우리 집에 있는 돌로는 횟집 칼처럼 잘 들게 만들 수 없다며 숫돌을 더 사야겠다는 거야. 난 우리 집 칼이 횟집 칼처럼 안 들어도 괜찮고 지금이 딱 좋다고 했는데 맑음이는 칼에 종이만 대어도 쓱 잘리게 하고 싶다는 거지.


숫돌 3종류를 골라서 주문해 달라고 하길래 주문해 줬어. 처음에는 본인 용돈으로 사겠다고 하더니 금액이 조금 부담되었는지 협상을 시작하더라. 부엌칼을 가는 데 쓰는 거니까 엄마가 조금 보태 주었으면 좋겠다고. 배송비 정도만 엄마가 부담해 주겠다고 하니 맑음이도 좋다고 했어.


숫돌이 오늘 도착한 거야. 울 맑음이 수요일인 오늘은 학원 수업이 하나도 없는 날이야. 어떻게 했겠어. 당연히 칼을 갈고 또 갈고 또 갈았지. 새로운 숫돌이 왔는데 가만 있을 수 있나?


칼이 얼마나 잘 드는지 몰라. 파도 그냥 송송 썰어지고 토마토도 그냥 쑥 들어가. 요리할 맛 난다니까.


칼 가는 아들 매력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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