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시장을 보지 않았더니 냉장고가 텅 비었어. 냉장고가 비면 난 불안해져. 뭔가 해 먹을 거리가 없다는 거잖아. 볶음밥을 하려면 양파와 햄이 있어야 하고, 나물 반찬을 만들려면 채소가 있어야 하고, 한창 크는 아이들에게 고기반찬을 먹이려면 고기가 냉장고에 있어야 하거든.
그득그득 채워진 냉장고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 무엇이든 해 먹을 수가 있잖아. 그리고 하나씩 소진해 가는 즐거움이 정말 커. 냉장고 서랍이 하나씩 비워질 때마다 묘한 쾌감을 느끼지. 근데 그 이후에는 또다시 불안이 시작돼. 아이들에게 뭘 해 줘야 하는데 재료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비워진 자리를 빨리 채우려 하지.
그래서 거의 매일 시장을 봐. 시장을 매일 보는 사람이 며칠 일정이 있어서 시장을 못 봤으니 얼마나 불안했겠어. 텅텅 비어 가는 냉장고를 그냥 쳐다만 보고 있는 사람의 불안한 마음을 알까?
오늘은 냉장고를 꼭 채워야 했어. 여유롭게 시장을 볼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동선을 짧게 잡아서 꼭 사야 할 품목을 적어 봤어. 퇴근해서 반찬 가게에 들러 밑반찬과 잡채를 사고, 시장에 가서 양파, 시금치, 계란을 산 뒤, 고깃집에서 닭갈비를 산 다음, 마트에 들러 김밥 재료와 어묵, 라면을 사고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를 포장해 오는 코스야. 이걸 30분 안에 마무리해야 하는데... 나 할 수 있을까?
반찬 가게, 시장, 마트, 고깃집은 서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몇 걸음 걸으면 있는 정도는 아니고 자전거로 슝 이동하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거리야.(아! 주요 이동 수단이 자전거라는 걸 미리 말해 주지 않았구나. 자전거가 없으면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한 번에 살 수 없지. 거기다 앞 뒤에 바구니가 있는 자전거라서 가능한 거야.) 샌드위치 가게만 1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네. 푸름이가 좋아하는 샌드위치를 포기할까 싶었는데, 아니야... 가뜩이나 채소를 잘 먹지 않은 푸름이가 샌드위치에 들어가 있는 양상추와 양배추, 토마토는 싹 다 먹는 데다가 아침도 항상 패스하는 아이가 샌드위치가 있으면 꼭 먹고 가더라고. 그러니 샌드위치는 무조건 사야지.
30분! 머리로 계산하면 충분히 가능한 시간이었어. 자 출발!!!! 먼저 반찬 가게에 들렀어. 계획대로 밑반찬과 잡채를 담고 계산을 하는데, 꼬막무침이 보이는 거야. 밥에 쓱쓱 비벼 먹으면 맛있겠다 싶었어. 꼬막무침을 사면 쓱쓱 비벼 먹을 때 아삭아삭 씹힐 만한 채소도 사야 하잖아. 계획이 틀어지는데... 오늘은 아니야 하며 고개를 저었어. 반찬 가게 계획대로 완료.
이제 시장에 들러 양파, 시금치, 계란을 사야지. 야채 가게에 가니 길쭉한 오이가 싱싱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고. 사각거리는 오이가 먹고 싶어졌지. 오이를 담았어. 시금치는 김밥에 넣을 예정이었는데, 오이로 대체해도 좋을 것 같았거든. 계획에 없던 양상추도 하나 넣었어. 이것도 김밥에 넣으면 좋을 것 같았거든. 어머 이렇게 사고 보니 나 아까 꼬막무침 사도 됐겠어. 오이랑 양상추 넣어서 꼬막비빔밥 해 먹으면 딱인데. 아쉽네.
마지막으로 계란을 담고 보니 이미 내 자전거 바구니 앞뒤는 80프로 이상 채워졌어. 마트의 물건을 담으면 넘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마트는 꼭 가야 했어. 김밥 재료를 사야 하니까. 그럼 여기서 선택을 해야 했지. 자전거에 닭갈비를 담을 공간이 없을 것 같으니 고깃집을 갈지 말지. 오늘 먹을 게 많으니 닭갈비는 내일 사기로 했어.
이제 마트에 가서 김밥 재료와 어묵, 라면만 사면 되는데, 아이들 간식거리와 김치찌개용 고기도 눈에 들어오네. 여기서 또 고민이 시작되지. 배달 가능 금액만큼 사서 배달을 보낼까? 여기까지만 살까?
물건을 사는 건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야. 고민하다가 딱 여기까지만 사서 가져가는 것으로 결정했어.
마트에서 계산한 물건을 자전거 바구니에 다 담을 수가 없었어. 반찬가게에서 산 밑반찬과 잡채가 담긴 비닐을 바구니에서 꺼내 자전거 손잡이에 걸었더니 겨우겨우 카트에 있던 물건들이 자전거 바구니에 다 옮겨졌어. 다행이야.
자전거를 탄 내 모습은 아슬아슬 불안불안해. 바구니의 짐이 덜컹이다가 튕겨 나올 수도 있어서 속도를 낼 수도 없는 데다가 손잡이에 짐을 걸었더니 브레이크를 잡는 손이 불안불안하기도 해. 아... 울 푸름이가 샌드위치의 채소를 잘 안 먹었다면 샌드위치도 과감히 생략하고 집으로 갔을지도 몰라.
샌드위치를 사러 카페로 갔어. 시간이 많지 않아서 카페 앞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카페 냉장고로 직진했지. 샌드위치를 6개 사려고 했는데 카페 냉장고에는 5개밖에 없었어. 6개를 사면 우리 가족이 모두 하나씩 먹고 나머지 하나는 푸름이 아침용으로 먹일 수 있겠구나 했는데... 5개밖에 못 샀으니 아무래도 내 샌드위치를 푸름이 아침용으로 양보해야 할 것 같아.
샌드위치를 담은 봉지를 다른 쪽 손잡이에 척 걸고 집으로 향했어.(아고 힘들다.) 집에 도착해서 자전거에 있는 짐을 세 번에 걸쳐 현관 앞에 둔 다음, 또 세 번에 걸쳐 냉장고에 넣었어. 미션 클리어!
냉장고가 채워지니 마음이 편안해지네. 나에게 냉장고는 채워야 할 숙제 같은 존재인가 봐.
냉장고에 물건이 채워지면 가족들은 한 문장으로 말하겠지.
"엄마 시장 봤네."
이 문장 속에 얼마나 많은 수고로움과 고민, 선택이 들어가 있는지 가족들은 알까? 나 오늘 힘들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