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에세이] 훈육이 뭣이 중헌디?
왜 나는 여전히 시댁이 불편할까
시댁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을 먹으려고 식탁에 둘러앉았고, 아이가 앉은자리 뒤에는 주방 스위치 두 개가 있었다. 역시나, 아이는 뒤를 돌아 스위치를 껐다 켜기를 한 두 차례 반복했다.
처음에는 좋게, 부드럽게 말했다.
“밥을 먹는데 불을 끄니까 너무 어둡네. 불 켜자. 이제 그만하자.”
아이는 나의 말을 들은 척 만 척이었다. 아이가 손을 올려 스위치를 한 번 더 끄려는 순간, 아이의 옆에 앉아있던 나는 아이의 손을 잽싸게 내렸다. 그 바람에 아이는 팔꿈치를 의자 등받이에 부딪혔는데 아프다고 징징거렸다.
‘에고, 아팠어?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왠지 아이를 달래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아이의 말을 무시했다.
“이제 스위치 만지지 마.”라고 차갑게 말을 하고는 아이를 향한 눈을 반찬으로 향했다. 아이는 팔꿈치가 아팠는지 자신의 팔을 몇 번 더 문지르면서 ‘진짜 아픈데..’ 하고는 먹던 밥을 계속 먹었다.
그때, 내 맞은편에는 시아버지가 앉아 계셨고 아이와 나의 신경전을 계속 지켜보고 계셨다.
나는 아이의 고집에 지기 싫었고,
‘우리 며느리는 아이의 교육을 잘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시부모님 앞에서 아이에게 엄한 부모의 모습을 보이면 왠지 그것이 부모로서 잘하고 있다는 것처럼 보여질 것 같아서 일부러 아이를 차갑게 대했다.
아무리 내가 좋은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을 안 좋게 보는 사람도 있고, 내가 이상한 행동을 해도 그것을 좋게 봐주는 사람 역시 있는데, 나는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그 마음 때문에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나와 아이와의 관계에 균열을 내어버리고 말았다.
‘아이’와 ‘나’의 관계만 봐야 하는데 순간의 어리석은 마음으로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지 않았던 나는 집에 돌아와서 아이에게 사과했다.
“아까 할머니 집에서 의자에 팔꿈치 부딪힌데 아팠지? 미안해. 엄마가 스위치 끄지 말라고 네 손을 내렸는데 의자에 부딪힐 줄 몰랐어. 만져줄게. 지금은 안 아파?”
나는 어렸을 때, 이겨본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거의 엄마 말에 잘 따랐고 그렇지 않고 내 감정을 표현하고 화를 내면 잔소리와 비난을 들었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누군가의 비난에 나는 늘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애를 써서,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있기 마련이었고, 그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었는데 그 노력은 나의 아이에게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불편한 상황에서 나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나를 방어한다. 비난을 듣지 않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아이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 불편한 상황이 내게는 바로 ‘시댁’에 있는 상황이었고, 시부모님에게 잘 보이기 위한 방법으로 ‘엄한 부모’의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다. 나는 배우가 되어 연기를 했다. 그렇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잘하고 있다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시댁만 다녀오면 몸의 온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시댁에서 나 자신이 아닌 것을 ‘연기’ 하다 보니 집에 돌아오면 너무 지쳐서 그대로 바닥에 누워있곤 했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고, 나 자신이 나를 인정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무의식에서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인정을 구하고 있었다.
‘뭐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인정받지 못했던 과거를 인정할 수 있을까.’
나는 나뿐만 아이라 아이를 위해서라도, 인정받지 못하고 매번 잔소리와 비난을 들었던 나의 과거를 인정해야 했다.
때로는 ‘될대로 되라지!’의 정신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래, 나 인정 못 받았어. 지금도 그렇고. 그래서, 그게 뭐 어떤데, 그래서 어쩌라고!’
그렇게 변화는 시작되었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나의 속도로,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