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칸 위의 잔다르크

넷플릭스 다큐 <체스의 여왕> 리뷰

by 전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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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예전에 헝가리에 체스 신동 소녀가 있었다... 뭐 그런 얘기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자세히 들어보니 정말이지 놀라운 면이 많은데요. 같이 한번 따라가 보시죠.

넷플릭스를 통해 최근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이념과 유리천장을 모두 부수고 정상에 우뚝선 놀라운 소녀의 이야기, <체스의 여왕>입니다.



줄거리 (스포 없음)

1980년대 초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가정집은 유난히 분주합니다. 바로 폴가 가족이 체스 훈련을 하느라 그런 것인데요. 경직된 공산주의 사회에서 어떻게든 성공하려면 뭔가 특기가 있어야 한다는게 아버진 라즐로의 생각입니다. 라즐로는 세 딸을 홈스쿨링 시키면서 오로지 체스, 체스, 체스만을 두게 합니다.

"왜 하필 ‘체스’였나요?"

다큐멘터리를 녹화하는 제작진이 폴가 가족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가족 중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죠.

"그게 가장 돈이 안 들었거든요."

이유가 무엇이든 폴가 가족의 체스왕을 향한 여정은 시작했습니다. 수잔, 소피아, 유디트 세 자매는 아버지의 엄격한 지도 아래 오전에 1번 과외, 오후에 2번 과외, 저녁에 3번째 과외를 받으며 체스 강자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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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체스의 세계는 남성중심의 사고가 강했고, 여성 토너먼트는 따로 열리고 있었지만 라즐로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여성도 똑같이 성과를 낼 수 있고, 여성 토너먼트에만 출전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이런 아버지의 생각에 따라 세 자매는 누구와 붙어도 이길 각오로 훈련에 임했고, 마침내 세 자매가 진짜 대회에 나갈 때가 다가옵니다.


세 자매 중 두각을 드러낸 건 첫째와 둘째였습니다. 막내인 유디트의 경우 ‘슬로우 스타터’였다고 자매들은 회고하죠. 그러나 유디트는 독종이었습니다. 그녀는 가장 열심히 체스를 두는 사람 중 하나였고, 승리를 향한 집념만큼은 언니들 못지 않았죠. 유디트는 9살에 헝가리 체스 연맹으로부터 2,080점이란 레이팅을 취득합니다. 통상 2,000점 이상이면 성인 동호인 중 상위 1%라고 하고 이미 전문가 수준으로 본다고 하는데요, 당시 유디트의 기록은 남녀 통틀어 9살이 달성한 최고의 성과라고 합니다.


열 살이 채 되기 전에 최고 수준에 다른 유디트는 이미 헝가리 여성 토너먼트에서는 겨룰 상대를 찾지 못했습니다. 폴가 가족은 그래서 더 큰 무대를 찾기로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국제 대회에 나가려면 출국 수속을 해야 하는데, 보수적이기 짝이 없는 헝가리 정부에게는 여성을, 그것도 아동을 체스 대회에 내보내기 위해 출국 허가를 해줄 생각이 요만큼도 없어보였거든요.


자, 폴가 가족은 과연 정치적 한계를 뛰어넘고 체스의 왕이 되는 길을 온전히 걸을 수 있을까요? 유디트가 바라는 것처럼 언젠가는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체스의 신, 개리 카스파로프와도 겨룰 날이 올까요? 정치적 이념과 성차별과 꼼수, 그 모든 것을 꺾고 승리하는 위대한 인간의 이야기 <체스의 여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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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평 (스포 있음)

체스 이야기라고만 생각하면 <체스의 여왕>은 작은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큐를 열심히 관람하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체스를 제외하고도 적어도 5개의 강력한 상대와 싸워 얻은 위대한 승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첫 번째 상대는 정치입니다. 80년대 냉전시대, 헝가리 공산주의 정권의 엄혹한 현실을 뚫고 국제무대로 나아가는 폴가 가족의 이야기는 여태 이념에 짓눌려 사고하는 현대인류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두 번째 상대는 유리천장입니다. 체스는 남성들의 경기라고 생각한 사람들, 그걸 넘어 애초에 여성은 별로 똑똑하지 않다고 함부로 말했던 모두에게 유디트는 그야말로 본때를 보여줬습니다. 유디트의 업적은 '여자 체스 선수에 대한 인식'을 넘어 차별의 시선 전반을 허무는 중요한 한 걸음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상대는 꼼수입니다. 숙적 카스파로프는 그녀와의 초기 대결 중 유치한 꼼수를 썼습니다. 그런데도 유디트는 차분하게 자기 스탠스를 지킵니다. 그리고 결국 카스파로프를 꺾는데 성공하죠.


여기까지만 다뤘다면 작품은 꽤 괜찮은 다큐 정도에 그쳤을 겁니다. 그런데 <체스의 여왕>은 무려 두 번의 승리를 더 거둡니다. 네 번째 상대는 바로 실험입니다. '체스 천재로 길러낸다'는 아빠의 가혹한 실험, 그게 유디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다큐에서도 다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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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체스 선수로서는 큰 업적을 남겼지만 개인으로서 유디트의 삶에는 빠져 있는 게 많습니다. 평범한 학교 생활, 여행, 취미 같은 것들 말입니다. 보통사람이면 누구나 누리는 그런 요소들을 싹 걷어내고, 그 빈자리에 모두 체스를 채웠습니다. 유디트의 인생은 오로지 체스에 의한, 체스를 위한, 체스만을 생각하는 삶이었죠.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아버지인 라즐로입니다. 이제 50의 나이가 된 유디트에게 제작진은 묻습니다.


"당신의 인생이... 아버지의 실험 결과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말을 머뭇거리는 유디트. 긍정/부정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얽힌 듯한 그녀의 표정을 통해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단편적인 문장들로는 들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체스의 여왕> 유디트의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밝고 힘찬 기운을 불어 넣으며 끝이 납니다. "아버지가 꿈꾸었던 그 모든 걸 유디트가 실현시켰으면서도 여전히 아주 평범하고 쾌활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전달하면서 말입니다. 즉 유디트는 실험과 싸워서도 이겼습니다. 강력하게 통제된 삶을 살면서도 마음의 명랑함을 지켜낸 그녀의 승리는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이렇게 백전백승이니, 64칸 위의 잔 다르크라 불러도 틀린 말이 아니겠군요.



마지막 5번째 상대는 바로 그녀 자신입니다. 혈기 왕성했던 시절 유디트는 비기는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지더라도 끝까지 싸우는 쪽을 택했죠. 그런데 문제는 비겼다면 그대로였을 그녀의 체스 레이팅이, 지는 바람에 자꾸 깎여 나갔다는 점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디트는 투지는 높았지만 점수 관리의 노하우는 없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방식을 바꿉니다. 남편에 따르면 남편이 조언을 했다고 하는데요, 계기가 무엇이었든 그녀는 비기는 경기도 수용하는 것으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 결과 전략적으로 점수를 관리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더 큰 선수가 되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고집을 버리고 더 유연한 태도를 갖춘 것은 그야말로 자신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라고 봐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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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체스의 여왕>는 이렇게 유디트의 위대한 승리를 통해 관객에게 큰 영감을 불어넣는 작품입니다.동시에 저는 이 작품이 '인생 발전을 위한 꿀팁'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재미 차원에서 제가 발견한 꿀팁을 몇 개 적어봅니다.


첫 번째는 '일단 보여줘라'입니다. 헝가리 정부는 처음에 폴가 가족의 여정에 관심조차 없지만, 자매들이 우수한 성적을 내기 시작하자 전폭적으로 지원을 시작합니다. 즉 백날 설명해봤자 의미 없고 눈으로 보여줘야 힘이 생긴다는 사실을 영화는 강조합니다.


두 번째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찾아라'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며 카스파로프라는 체스의 신이 없었다면 유디트라는 선수도 없었을 거라고 감히 짐작했습니다. 카스파로프는 유디트에게 처부수어야 할 숙적임과 동시에 가장 큰 영감이었고, 매일 훈련하게 하는 동인이었을 겁니다. 여러분께서도 뭔가를 잘해내고 싶다면 여러분보다 훨씬 뛰어난 그 누군가를 찾아 만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조언을 들어라'입니다. 유디트는 비길 줄도 알아야 한다는 남편의 조언을 수용했고, 훗날 카스파로프의 초대에 응해 그와 함께 훈련까지 하게 됩니다. 이렇게 유연한 태도 없이는 다음 단계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걸 유디트의 여정이 잘 보여주는 것 같네요.


혹시 여러분께서 발견한 꿀팁이 있다면 그 얘기도 들려주세요. 그리고, <체스의 여왕>만큼 동기부여가 되는 작품을 또 알고 계신지도 궁금하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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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체스의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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