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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 금융 기술 vs. 국민 술

- 영화 <소주전쟁> 리뷰

by 전새벽



1997년 IMF의 위기 속에 국민 소주 브랜드 진로가 부도 위기에 놓였다. 회사는 구조조정 컨설턴트로 골드만 삭스를 선임했다. 골드만 삭스는 친절한 구원투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지만 속으로는 시커먼 흑심을 품고 있었다. 이른바 선진 금융 기술을 통해 진로를 헐값에 싸서 비싸게 팔아치우겠다는 속셈이었다.


2025년 영화 <소주전쟁>은 이 사실을 각색한 기업회생-서스펜스-우정-드라마다. 극중에서 진로는 ‘국보’로, 골드만 삭스는 ‘솔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유해진은 국보를 사랑하는 못 말리는 소주광 재무이사로, 이제훈은 솔퀸 코리아의 지점장을 노리는 냉혈한 컨설턴트로 분장했다.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사이의 숨 막히는 긴장 구도 위에 서로로 인해 점차 변해가는 두 남자의 케미를 알맞게 녹여냈다.


영화는 치밀한 외국 자본의 계략 앞에 꼼짝 없이 쓰러지는 순수한(바꿔 말해 약간 실력이 부족한) 국내 대기업의 행보를 처연하게 쳐다본다. 그럼에도 <소주전쟁>은 신파로 흐르지 않는데, 이야기가 철저하게 밸런스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유해진은 정이 가는 캐릭터이지만 가족보다 회사를 우선시하는 볼품 없는 가장이다. 이제훈은 약삭 빠른 사람이지만 무엇이 옳은 건지를 끊임 없이 고민하는 청년이다. 악당 그룹 솔퀸에는 비상한 머리로 큰 돈을 벌어내는 유능한 사람들의 성취가 있고, 피해자 그룹 국보에는 욕 먹어도 싼 부패 경영자가 있다. 이 치밀한 밸런싱이 더 없이 부드럽고 프레시하다. 실화에 기반한 결말(재판부의 결정)은 정말이지 소주 한 잔 당기게 한다.




주연 두 사람 외에도 눈여겨 볼만한 배역들이 있다. 홍콩계 미국인 배우 바이런 만이 악역을 멋지게 소화해냈다. 그가 입을 열면 반드시 두 가지가 나오는데 하나는 금액이고 하나는 쌍욕이다. 금액이 쌍욕과 만났을 때 인간은 얼마나 볼품이 없어지는가. 그 멋진 수트와 헤어스타일에 불구하고고든은 작품 속 가장 저열한 인물로 비쳐진다.


손현주가 연기한 석회장 역시 밸런스의 중요한 요소였다. 인물 대부분이 쎈 연기를 하는데, 손현주는 한껏 힘을 빼고 바보를 연기했다. 고든이 천박한 자본주의의 화신이라면 석회장은 무능과 부패의 화신이다. 석회장이 무능함을 내비칠수록 그의 충신 유해진을 바라보는 관객의 심경이 복잡해진다. 아, 소주 한 잔 마시고 싶다.



법무법인 무명의 변호사 영모를 연기한 최영준 배우 얘기도 하지 않기가 어렵다. 최영준은 자신이 누구인지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서사에 트위스트를 줬다. 말쑥한 신사인 줄로만 알았는데, 파티 장면에서 그가 보여준 제스쳐는 <소주전쟁>이 치밀하게 짜여진 캐릭터물로 승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김기해가 맡은 신입사원 성빈도 있다. 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던 성빈. 마지막에 존재감 드러낸다. 스포를 할 수 없어 말을 아끼게 되지만 분명한 건 <소주전쟁>이 참 치밀하게 짜여진 웰메이드 캐릭터물이라는 사실이다.



최국희 감독의 2018년작 <국가부도의 날>과 나란히 놓고 보는 재미도 있다. <국가부도의 날>의 핵심은 국가 부도를 앞두고 각기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숨 막히는 긴장이다. 두 영화는 시대적 배경도 같고 쫀쫀한 서스펜스도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한 쪽의 손을 들어주라면 나는 미련 없이 <소주전쟁>의 손을 잡는다. <국가부도의 날>은 선과 악을 너무 선명하게 그렸고, 그 결과 극의 다이나믹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승리의 비결은 캐릭터성에 있다. 이제훈과 유해진, 모두 다양한 면을 가진 사람인 것을 관객은 쉽게 알 수 없다. 그래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몰입이 유지된다. 반면 <국가부도의 날>의 인물들은 모두 한 가지 면만 가지고 있는데, 가장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 허준호의 캐릭터다. 어음이 부도가 나서 힘들어하는 중소기업 사장 허준호는 IMF 피해자를 대변했다. 그런데 허준호가 너무 착하고 성실하기만한 순도 100% 피해자라, 허준호가 등장할 때마다 관객은 똑같은 말을 자꾸 듣는 기분이 든다. 알았어, IMF때 서민들이 고통받았다는 거 알겠어. 알겠으니까 그만해... 이런 마음이 몰입감을 몰아낸다. 정의의 메시지가 싫다는 게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이미 다 파악해버린 메시지를 자꾸 수신하는 게 피로해진다.



<국가부도의 날>과 달리 <소주전쟁>에는 적절한 유머도 있다. 개그만 이창호가 등장하는 짧게 등장하는 장면들에서 관객은 잠깐 긴장을 풀고 웃을 수 있다. 소주 연구원 이창호의 관심사는 '의도한 대로 시음 반응이 나오는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신제품을 시음한 이제훈은 '달고... 쓰네요...'라는 첫 품평을 한다. 그러자 국보의 직원들은 소주가 원래 달고 쓴 거라며 너스레를 떤다.


단 맛인데 쓰기도 하다... 캐릭터성의 핵심은 이 아이러니에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정의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셀 수 없는 오점들을 지닌다. 영화에서 '지키는 자' 역할을 하는 유해진은 가족은 못 지켜냈다. '빼앗는 자'의 이제훈은 끝내 모든 것을 빼앗긴다. (앗! 스포!) 이 아이러니가 관객을 끝까지 앉아 있게 한다. 주제 사라마구의 말을 인용하며 마친다.



우연, 운명, 운, 숙명, 워낙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 어떤 것이 정확한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순전히 아이러니로 이루어진 것이다.
- 주제 사라마구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202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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