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큰 공포에 관한여
‘내가 가진 가장 큰 공포에 관해 글쓰기’라는 주제를 집어 들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가족이었다. 삼남매를 키우는 나는 평소 아이들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자주 시달린다. 차가 돌진해오면 어쩌지, 머리 위로 간판이 떨어지면 어쩌지, 범죄자를 만나게 되면 어쩌지…
그래서 상실에 대한 공포에 관해 쓰기로 결심했다. ‘영화 한 편의 내용과 연결시킬 것’이란 숙제의 추가 조항은 <맨체스터 바이 더 씨(케네스 로너건, 2016)>로 해결할 셈이었다. 영화는 가족을 잃고 황폐해진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남자의 일상을 그린다. 영화 속 리(케이시 에플렉)의 모습이 내가 가장 멀리하고 싶은 모습이었다. 시도때도 없이 긴장을 유발하고 만성피로를 야기하는 나의 공포란, 리처럼 되지 않고 싶다는 염원의 다른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가족 상실의 공포는 너무 보편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글이란 늘 글쓴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믿는 편이었는데 보편적인 공포에 대해 얘기해봐야 나라는 사람이 잘 설명되지 않을 거란 판단이 순간 들었다. 그리고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을 떠올렸다. 인간에게는 층위별로 욕구가 존재하고, 하나의 층위가 해결되어야 다음 층위를 목표할 수 있다는 이 오래된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다음의 단계를 밟아 욕구를 완성하는 존재였다.
1. 생리
2. 안전
3. 소속
4. 존경
5. 자아실현
가족 상실에 대한 공포는 2단계였다. 1단계와 2단계는 너무 보편적이다… 그래서 나는 3단계를 보기로 했다. 나와 내 가족이 안전하다고 치고, 그 다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곧, 한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대풍고등학교 2학년 충길은 아침에 일어나 개밥 주고 밤에는 혼술 때리는 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드리며 살고 있다. 겉으로는 잔잔한 일상. 하지만 사실 그의 마음 속에는 들불이 끓고 있는데… 다른 아닌 레슬링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이다. 비록 혼자 남은 체육관이지만 오늘도 수련에 힘쓰는 그의 기합소리는 전국제패를 할듯한 기세로 울려 퍼진다.
대풍고로부터 멀지 않은 한 건설현장, 전투복 차람의 진권이 막노동을 하고 있다. 충길과 레슬링에 몰두했던 한 때를 뒤로 하고 그는 여기서 생활비를 벌고 있다. 어느날 충길이 그런 진권을 찾아온다. 목적은 ‘같이 도(道)대회를 준비하자’는 것.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도대회냐며 내쫓기엔 충길의 열정이 너무 강한데. 결국 진권은 친구 따라 도대회에 나가보기로 한다.
그 시각, 읍내의 한 미장원에서 90년대 아이돌 머리를 한 혁준이 나온다. 누나에게서 억지로 타 낸 용돈을 가지고 헌팅을 하러 다니는 이 삼류 양아치를 신은 정녕 버린 것일까. 아니다. 그에게는 형이 있다. 형은 혁준을 찾아와 대학에 가라고 강권한다. 방법은? 한 가지 있다. 대풍고 레슬링부에서 실력을 익혀 특기생을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
고봉수 감독의 <튼튼이의 모험(2018)>은 이러한 이야기를 가진 사랑스런 청춘 영화다. 요약하면 ‘엉성한 청춘들의 노답 레슬링 도전기’인데. 보면서 눈물과 웃음이 같이 난다. 짧게 감상평을 말해보라면 뭐랄까, 세상에 이런 영화가 많았으면 좋겠다.
<튼튼이의 모험>의 표면적 이야기는 도대회이지만 내면적 이야기는 따로 있다. 충길과 진권, 혁준은 대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진짜 필요했던 것을 얻는다. 그건 바로 소속감이다. 매일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 모여 만날 사람들이 있다는 것, 대화의 주제가 계속 있다는 것. 그게 소속감이다. 영화의 끝에 대회 결과가 좋지 않음에도 관객이 실망하지 않는 이유, 패배했음에도 관객의 속이 국밥 한 그릇 비운 것처럼 뜨뜻-한 이유는 인물들이 소속감을 바탕으로 단단해지는 과정이 흡족하게 누렸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자면, 세상에 이런 영화가 많았으면 좋겠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서 내게는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바로 ‘언제까지 일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다. 그건 무엇보다 돈벌이의 문제다. 막내가 대학갈 무렵 내 나이 60인데 그때가서 우리 가족은 뭘 먹고 사나. 생각해보면 아득해진다.
다만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부부에게는 다 계획이란 게 있는 것이다. 첫째는 김연아, 둘째는 아이유, 셋째는 페이커처럼 키워내기로 했고 그 중 하나 정도는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때 가서 내 월급 따위가 대수랴.
그런데 돈 문제가 해결된다고 치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바로 소속감의 문제다. 은퇴할 무렵이 됐을 때 내 직장경력은 한 30년쯤 될 거다. 그리고 집으로 보내지겠지. 30년을 조직에서 살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자연인이 된다고? 생각만해도 무섭다.
하여, 나의 공포란 다름 아닌 ‘언젠가 이 소속감이 사라진다’는 전제 때문에 존재한다. 회사에서 ‘참 열심히 한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 이유, 누가 채근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어쩌면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왕이면 일 잘 하는 사람으로 이름을 날려, 오래오래 불러주는 곳이 있기를. 그리하여 나라는 사람이 오랫동안, 도대회에 나가겠다며 쩌렁쩌렁한 기합을 넣는 청년으로 남을 수 있기를.
공포는 오늘도 그런 바람을 낳고, 페이커는 최근에 또 새로운 광고를 찍었다.
2025.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