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캣 앤 마우스 스릴러
<캐치 미 이프 유 캔>, <디파티드>, <킬링 이브>... 모두 성공을 거둔 작품들입니다. 이야기는 서로 다르지만 이들 작품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요, 바로 서로를 집요하게 쫓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쥐를 잡는 고양이의 모습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를 가리켜 영미권에서는 '캣 앤 마우스 장르'라는 표현도 쓴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 캣 앤 마우스 장르의 영미소설을 한 편 가지고 왔습니다. 도입부부터 크게 매료되어 며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작품인데요. 기발한 서사와 탄탄한 묘사, 그리고 끝내 명랑함을 잃지 않는 웰메이드 희곡이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애슐리 엘스턴의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애비 포터는 최근 남자친구 라이언으로부터 동거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만난지 불과 몇 개월 밖에 안됐지만 워낙 서로를 좋아하다보니 애비 역시 마음이 동했죠.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동안 라이언에게 전했던 자기소개가 대부분 거짓이라는 겁니다. 살고 있는 집, 갖고 있는 가구들 같은 것들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함께 짐을 옮겨주겠다는 라이언을 속이기 위해 애비는 일을 꾸밉니다. 단기로 방을 임대해 싸구려 살림을 채워놓은 것이죠. 마치 자신이 평범한 곳에서 평범하게 살아온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라이언은 그곳에서 애비와 함께 짐을 쌉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동거 생활. 애비가 뭔가 중요한 걸 숨기고 있다는 걸 라이언은 아직 모르지만, 독자들의 머릿속엔 벌써 큰 물음표가 하나 떴습니다.
얼마 뒤, 한 파티장소에서 커플은 아는 사람들을 마주칩니다. 정확히는 라이언이 옛친구 제임스와 맞닥뜨린 것인데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된 그들에게 제임스가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바로 여자친구 루카라고 하네요. 애비는 루카를 바라보며 그녀가 자신과 지나치게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엄청난 불안감을 느끼게 돼죠. 루카라는 여자가 말하는 자신의 고향, 가족 이야기, 그리고 이름 모두 수상하기 때문입니다.
애비는 곧 여자의 존재가 자신을 위협할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애비의 다음과 같은 독백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한층 더 큰 미스터리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갑니다.
저 여자는 노스캐롤라이나 이든 출신이 아니다 - 내가 이든 출신이다.
저 여자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죽지 않았다 - 내 엄마가 유방암으로 죽었다.
저 여자의 이름은 루카 마리노가 아니다 - 내 이름이 루카 마리노다.
- 본문 중에서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는 위와 같은 도입부로부터 출발하는 흥미진진한 소설입니다. 주인공의 정체는 대체 뭘까? 라는 미스테리가 먼저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 당기지요. 다 읽고 나면 어디서 봤던 여러 범죄/액션/반전 스릴러의 요소들이 적당하게 짬뽕되어 있다는 걸 알지만, 애슐리 앨스턴의 정교한 솜씨 덕분에 독서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강점은 진실이 드러나는 순서가 매우 영리하게 배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독자들이 집중력을 잃기 전에 하나의 진실을 내어줍니다. 그런데 그 진실은 또 다른 미스터리를 품고 있지요. 새로운 미스터리를 따라가다보면 또 다른 진실이 나오고, 거기서 또 다른 미스터리가 출발합니다. 마치 마트료시카 (목각인형 안에 목각인형이 반복되는 겹인형 형태의 러시아산 공예품)를 여는 것 같은 재미랄까요?
두 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저자의 탄탄한 글쓰기 솜씨입니다. 소설을 읽는다기보다 TV시리즈를 보는 것 같이 느껴질만큼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는 묘사가 훌륭한 작품입니다. 인물, 의상, 감정, 장소, 동작 모두를 탁월하게 그려낸대다 특히 장소와 의상이 장면마다 현란하게 바뀌는지라 넓은 어휘의 바다에서 한껏 헤엄친 기분이 들더군요. 이 작품은 훌루에서 TV시리즈로 제작중이라고 하던데, 어떤 제작자라도 탐냈을만한 원고라는 생각이 과연 강하게 듭니다.
언덕 꼭대기의 붉은 목조 창고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목초지는 새하얀 울타리로 둘러싸인 초록 바다 같다. 창고 옆면에는 영화 상영관 크기의 초대형 스크린이 있고, 새하얀 테이블보를 덧씌운 테이블 사이사이에 그보다 작은 스크린이 여럿 설치되어 경마대회를 실시간 중계로 볼 수 있다. 서빙하는 사람들이 미니 핫 브라운과 개별 그릇에 담긴 치즈 그릿과 세심하게 만든 한 입 크기 샌드위치가 놓인 은쟁반을 들고 군중 사이를 누빈다.
지방 판사가 느긋한 걸음걸이로 발걸음을 옮긴 후 어떤 커플이 가까이 오자 라이언은 화들짝 놀란다.
"라이언!" 남자가 외치며 한 팔을 라이언의 목에 감고 힘주어 끌어당긴다. 두 남자가 엎치락뒤치락 포옹을 하며 회포를 푸는 동안 나는 남자와 같이 있는 여자를 관찰한다. 나와 맞머을 정도로 키가 크고 긴 머리카락은 옅은 갈색이다. 호리호리하지만 근육질인 것까지 그 여자와 나의 신체적 유사성은 모를 수가 없다.
- 본문 중에서
마지막으로 꼽고 싶은 이 작품의 장점은 바로 톤입니다. 범죄/스릴러라는 장르 안에서도 작품의 톤은 다양하게 나눠질 수 있지요. 특히 어떤 엔딩을 배치하느냐에 따라 움울할 수도 있고 명랑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어떤 톤을 채택하든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일 겁니다. 작품의 톤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것만큼 허술해 보이는 요소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애슐리 앨스턴은 원래 아주 명랑한 사람인 게 아닐까요. 그런 생각이 들만큼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는 밝고 즐거운 톤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엔딩에서 그 힘을 한껏 발휘하지요. 내용을 미리 알려드릴 수 없어 자세히 적을 방법이 없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엔딩을 참 기분 좋게 읽었더랬습니다.
물론 아쉬운 걸 늘어놓자면 몇 개쯤 바로 떠오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너무 엄청난 능력의 조력자를 별로 어렵지도 않게 얻은 탓에 일이 잘풀린다는 설정 같은 것들 말입니다. 또 기본적인 문법 안에 온갖 클리셰를 섞어 두었다는 비판도 쉽게 가능한 것 같고요. 그럼에도 이 정도 '기본적인 문법'을 지켜내는 소설이 점점 더 찾아보기 어려워지는 것 같아, 이 정도면 한번쯤 추천하고 싶은 수준이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이 책을 쓰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는 청소년 도서 시장에서 일반 도서 시장으로 넘어왔고, 에이전트와 출판사를 바꾸어 새롭게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 애슐리 엘스턴, <감사의 말>중에서
소설 속 애비는 매번 새롭게 시작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하나의 일이 끝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또 새롭게 시작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결말부를 통한 그녀의 새로운 시작을 독자들은 응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쓴 작가 역시 뭔가를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바로 YA(Young Adult; 청소년 문학)책 시장에서 성인물로 넘어온 것이죠. 그리고 그 결과는? 그야말로 대히트입니다.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됐고 첫해 미국에서만 100만부가 팔려나갔죠. 그리고 영상화 계약을 확정하면서 애슐리 앨스턴은 이제 출판업계뿐 아니라 TV판에서도 눈여겨 보는 작가가 됐습니다.
청소년 문학가가 난데없이 스릴러 소설을 들고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면 그건 믿을만한 얘기일까요? 어쩌면 엘스턴은 이 작품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반복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청소년 문학가가 아니다. 청소년 문학만 쓸 줄 아는 작가가 아니다. 나는 매혹적인 스릴러를 잘 쓸 수 있고, 독자들의 성원을 반드시 얻을 거다... 라는 근거 없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리고 정말 해냈네요. 정말이지,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한 게 틀림 없습니다.
엘스턴의 차기작은 이미 표지와 시놉시스가 공개됐습니다. <알리바이의 해부학(Anatomy of an Alibi)>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내년 1월 출간된다고 합니다. 한국어판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를 발간한 문학동네에서 빠르게 움직여줬으면 좋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