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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May 12. 2018

소외

'어떤 불행이나 사고에 대해서는 태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또는 이와 반대로, '나만은 예외가 되겠지'하고 생각하기도 한다'(시몬느 보봐르, 제2의 성')


나는 평소에 '예외가 아니다"라는 말을 글에서 곧잘 사용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한 치 앞의 일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예기치 못한 불행이나 사고에서 예외 되는 인간은 없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경험이 그렇지 않았고, 또 주변 상황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서 미래 또한 반드시 계속 그러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책, 블랙스완에 이런 글이 나온다. "탁월한 철학자였던 버트런트 러셀은 철학에서 귀납법의 문제, 혹은 귀납적 지식의 문제라고 부르는 것의 예증으로써 내가 말하는 돌발적 충격의 특히 유해한 한 가지 변형된 형태를 제시한다. 칠면조 한 마리가 있다. 주인이 매일 먹이를 가져다준다. 먹이를 줄 때마다 ‘친구’인 인간이라는 종이 순전히 ‘나를 위해서’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이 인생의 보편적 규칙이라는 칠면조의 믿음은 확고해진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을 앞둔 어느 수요일 오후, 예기치 않은 일이 이 칠면조에게 닥친다. 칠면조는 믿음의 수정을 강요받는다. 귀납적 지식의 가장 우려스러운 측면인 소급 학습에 대해 생각해 보자. 칠면조의 경험의 가치는 0이 아니라 마이너스다. 칠면조는 관찰을 통해 배웠다. 바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방법이다. 친절한 먹이 주기의 횟수가 늘어 갈수록 칠면조의 믿음은 견고 해지며, 그리하여 도살의 순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데도 칠면조는 점점 더 안심한다. 칠면조의 안심이 최고점에 도달한 그 순간이 생명의 위험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임을 생각해 보라. 이 문제는 좀 더 폭넓게 일반화될 수 있다. 과거에 내내 통했던 것이 어는 순간 예기치 않게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며,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운 것은 최선의 경우에 쓸모없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치명적인 파국을 낳는다."(p 97)


예외(例外)의 사전적 뜻은, '일반적 규칙 혹은 일정하게 정하여진 규칙이나 관습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외와 가까운 말 중에 제외가 있다. '예외'하면 어떤 '특권'같은 것을 연상하지만, '제외'하면 '소외'(alienation)가 연상된다. 소외란,  '어떤 무리에서 기피하여 따돌리거나 멀리함'이라고 사전에 풀이되어 있다. 백과사전에는 소외를 이렇게 설명한다. "일반적으로는 사귐이 멀어진 상태이며 좁은 의미로는 정신 착란. 프로이트 학파에서는 문화기구에 대한 개인의 적응장애로서 ‘개성의 해체’의 한 특징으로 본다. 또한 철학에서는 자기 소외의 의미로 사용한다. 자기가 자기의 본질을 잃은 비본질적 상태에 놓이는 것을 일컫는다." 말하자면, 개인이 자신의 의지나 주관이 아닌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서 따돌림을 당하고 자기 삶의 현재와 미래가 결정되는 상태,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 주체를 상실한 상태가 곧 자기 소외인 셈이다.


따라서 소외는 자연스럽게 무기력, 자포자기 혹은 의존 등과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는 자유와 연결 지어 설명한다. 루소가 말하는 소외란, 개인이 가진 근원적인 자유가 남에게 위탁 혹은 양도되어, 권리를 상실한 상태다. 현대철학에서 소외 개념을 구체적으로 기초를 놓은 사람은 헤겔이다. 헤겔의 소외는 인간의 정신이 자기 밖의 것으로 외재화 되고 대상화된 상태다. 소외 개념에서 분리와 상실은 중요한 핵심을 차지한다. 이는 외재화(外在化 externalization)와 대상화(對象化 objectification )의 두 개념으로 설명된다.


외재화란, 내면적인 어떤 현상 또는 일 등을 자기 주관 또는 인식과 직접적인 관련 없는 외부세계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즉 실체가 불분명한 내면적인 것을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외적인 것으로 객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 해결 방식에 있어서 외재화의 과정은, 문제를 객관화하여 살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기도 한다. 한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외재화는, 비슷하지만 심리적 방어기제로 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기 방어기제인  "투사(projection)"가 이에 해당한다. 이는 곧 자기 내면의 문제를 심리적으로 자기와는 무관한 외부의 문제나 다른 대상에게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실체가 보이지 않는 내면의 무의식이 분석 가능한 의식의 상태로 객관화하는 과정, 그것이 곧 외재화라고 이해해도 되겠다. 그래서 투사의 확인 여부는 정신분석 치료에서 주요 관건 중의 하나다.


일반적인 심리치료에서 개인이 처한 문제를 취급할 때, 그 사람에게 문제를 야기시키는 감정과 문제가 되는 상황을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것, 즉 사람과 문제를 구분하여 다루는 작업, 역시 외재화에 해당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화를 낸다면, 보통의 경우 내가 관련된 문제 상황 때문에 화를 낸 것이지, '나' 란 존재 자체를 싫어하고 미운 감정 때문에 화를 내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문제 상황과 감정 혹은 사람을 동일한 것으로 판단하고 인식하는데서 인간관계의 오해와 갈등이 증폭된다. 여하튼 감정에서 사람과 문제를 분리시키는 것이 심리치료 현장에서 말하는 외재화라 이해하면 되겠다. 결국 외재화 개념의 핵심은 공히 무의식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하여 살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대상화란,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그 무엇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구체화하여 마치 물건처럼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타인의 성(sex)을 자신이 소유하고 자기 의지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사람을 마치 상품처럼 소유하고 취급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각각을 부적절하게 대상화한 것이다. 대상화는 인간발달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개념이다. 특히 유아기에 부모의 양육태도, 특히 엄마와의 올바른 관계 형성이 그 밑바탕이 된다.


정리하면, 자기 외적인 대상을 마치 자기 것처럼 소유하고 자신의 의지로 다룰 수 있는 물건처럼 여기면 대상화, 자기와 상관없는 것으로 객관화하면 외재화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대상화는 자기와 관련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마치 대상을 물건처럼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동일시나 집착이 가능해진다. 반면 외재화는 문제를 자신과는 무관한 객관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평가와 분석 혹은 비판과 정죄와 질책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바탕에서 헤겔은, 외재화와 대상화를 통해서 소외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 정신활동의 과정이, 곧 인류 역사와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자신의 실존재를 자신이 아닌 상상 속의 신에게 투영하는 것을 소외라고 보았다.


현대 사상가들의 여러 논의를 종합하면, 소외란 인간 존재의 일반적인 양상으로, 자기라는 근본적인 실재가 현실과 분리되어 원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상태를 뜻한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에서는 자기 소외의 상태에서 파생되는 제반 갈등을 현대인이 앓는 정신병리와 직접 연관이 있다고 이해한다. 정신병리적인 관점에서 소외의 문제는 개인의 내면적인 상태로부터 기인하며, 성장 환경과 주변 상황적 요인이 큰 영향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소외의 사상적 계보를 이어, 소외의 개념을 추상적인 주관의 영역에서 사회구조적 현실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사람은 마르크스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소외의 개념에 입각하여 소외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사회 공동체가 갖고 있는 경제 사회적인 문제와 연결 지었다. 다시 말해 소외의 문제는 외부의 사회구조적 상황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동한다고 본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는 인간이 직면하게 되는 소외를 4 가지의 형태로 제시한다. " 첫째, 자연적인 노동활동으로부터의 소외. 둘째, 자기 생산 활동으로부터의 소외. 셋째 유(類)적 존재로부터의 소외. 넷째 다른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다"(칼 마르크스, '경제 철학 수고' 1844년 )  '유(類)적 존재'(혹은 '종(種)적 존재')란, 사회 공동체에 속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자유로운 활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실현하고 확인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다. 따라서 '유적 존재에서의 소외'는, 개인이 사회 공동체로부터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이 거부되고 분리된 상황이다. 자발적인 사회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실현할 수 없는 상태다.


마르크스는 4가지의 소외 중에서 특히 '자기 생산활동의 소외'를 가장 중요하게 보았다. 노동은 생산활동이고, 생산활동의 결과물이 상품이다. 상품의 생산 주체는 노동자다. 그런데 노동의 주체인 노동자는 단지 자기 노동활동의 대가만 받을 뿐이다. 상품과 상품의 가치로부터 파생하는 제반 경제적 이익의 결과물은 오직 자본가의 몫이다. 이것이  '자기 생산활동으로부터의 소외' 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주체인 노동자도 자본가와 동등하게 상품이 파생하는 제반 가치의 결과물을 공평하게 향유해야 한다고 이해했다. 마르크스적 소외의 문제는 헤겔의 사상처럼 관념이라는 추상적인 정신 활동이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사회구조의 개선의 노력과 변화, 그리고 사회적 실천을 통해 극복될 수 있고 또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다.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여러 철학적 논의가 말하는 '소외' 개념의 핵심은, 주체로서의 '통제력의 상실'이다. 즉 사회적 존재로 자유로운 개인이 외부적인 힘 또는 세력에게 자신의 통제력이 넘어간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고전적인 의미로 자기 본래의 자유를 타인에게 양도 혹은 상실한 상태인 '자기 소외'와 맥락을 같이 한다. 현재의 선택과 판단, 결정 그리고 미래의 향방까지도 자기가 아닌 외적인 대상에게 양도된 결정론적인 상황이다. 극단적으로는 정신적 노예상태라 해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독립적인 상태가 아니라 외적인 힘 혹은 세력에 종속된 상태다. 이처럼 소외는 단순히 주관적인 심리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상황이나 구조적인 환경에 존재하는 사회적 사실로 복합적인 심리현상임을 이해하게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인 루카치는, 인간의 소외를 야기하는 주요 원인은, 물신숭배주의 그리고 이를 토대로 인간을 상품이나 도구적 가치로 인식하고 평가하는 인간의 사물화에  있다고 이해한다. 이에 따르면, 상품으로써의 사회적 효용가치, 활동가치를 상실한 인간은 소외된 인간이다. 그 특징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가치에 대해 하등의 결정력이 없는 상태로, 주체성의 결여, 자기 통제력의 상실이다. 자기 통제력이 상실된 인간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정신분석학적으로 쉽게 설명한 이는 에리히 프롬이다. 프롬의 분석에 의하면, 소외된 보통의 인간이 심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아 포기 혹은 자기부정이다. 그 결과로 거부하고 저항하기보다는 인정하고 수용하거나, 혹은 동화하여 적응하는 방식을 택한다. 소위 자동인형이 되는 것이다. "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인형이 되어 주위의 수백만이라는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해진 인간은 이미 고독이나 불안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가 지불하는 대가는 비싼 것으로, 그것은 '자기의 상실'이다."(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이는 일종의 심리적 의존 상태로 자기 보호본능을 따른 결과다. 이와 달리 자기 포기 혹은 자기 상실이 자기 파괴라는 본능적 충동을 따르게 되면, 타인 혹은 자신에 대해 무분별하고 폭력적인 공격성을 표출하게 된다. 그 극단은 자살이다. 정신의학자인 카를 메닝거는 이러한 자기 파괴 본능에는 '죽기, 죽이기, 죽임을 당하기'라는 세 가지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심리적 동기가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심리적 의존의 극단은 중독이다.


의존이라 함은 자신의 내면보다 외부의 것에 가치와 권위를 두고 거기에 기대는 성질이다. 사전적으로 의존(依存, dependence)이란, '욕구 충족 또는 적응을 목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려는 경향'이라고 설명한다. 마르크스적 소외가 구조적 혹은 사회적인 외부의 힘에 의해 야기되어 그 대상을 뚜렷하게 특정할 수 없는 심리적 현상의 결과물이라면, 의존은 자기 포기의 결과로 발생하는 심리적 현상으로 그 대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말하자면 의존은 자기 소외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 심리치유 연구자들은 개인적이든 사회적 집단이건 간에 , 의존이 일정 한계를 넘어가게 되면 중독으로 간주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 문화적 세뇌 혹은 길들임이다. 여기엔 개인과 집단의 구분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의존적 인간이 비교 차원에서, '열등한 인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의존성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의존은 인간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꼭 필요한 것이다.' 사회적 인간이란 점에서 완전한 독립성을 가진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지나친 것이 문제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의존의 정도를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과도한 의존성은 오랜 시간에 걸쳐 무의식에 축적된, 억압되고 좌절된 욕구의 현실적 결과물이다. 과도한 의존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오직 받는 것만 추구할 뿐 주는 것을 모른다. 그 반대인 과도한 자주성(독립성 혹은 완벽주의) 또한 마찬가지다. 자기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으니, 철저히 의존하거나 아니면 철저히 타인의 도움을 거부한다. 과도한 자주성(독립성)의 문제는 도움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지도 않는 데에 있다. 그 핵심에는 무의식에 가려진 억압이 있다.


억압은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대신 마음속에 다져 넣는 것이다. 억압은 외부로부터 주어져서 내면에 축적된다. 이는 주로 성장의 과정에서 환경, 특히 부모와의 부적절한 양육태도, 그리고 사랑과 공감, 지지와 격려가 결핍된 관계의 경험이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성장과정과 정신발달 단계에서 반복되고 지속적으로 가해진 억압은 자기 정체성과 자존심의 형성에 부정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친다. 자기 정체성의 결핍과 낮은 자존심 형성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정신 병리적으로, 인간을 힘들게 하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집단 무의식의 관점에서 억압적인 사회환경이나 일방적이고 경직된 사회적 관습도 이와 동일한 영향력을 가진다. 일종의 사회적 집단 세뇌다.


예를 들면, 에리히 프롬이 제시하는 사회적 성격 중의 하나로 권위주의적 인격 (Authoritarian personality)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권위주의적 인격이란, '유연성과 융통성이 결핍된 경직화된 사고에 의해 강자나 권위를 무비판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성격'을 뜻한다. 권위주의적 인격은 자기 정체성이 훼손되어 있거나 결여된 인간의 전형이다. 개인이 속한 사회 환경과 문화 혹은 관습에 의해, 즉 사회화 과정에서 형성되고 학습된 후천적 인격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맞춰서 길들여지고 적응된 인격이다. 한나 아레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특징을 가진다. 프롬이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힘에 대한 태도다. 인물이나 시스템을 구분하지 않고 상관없이 단지 그것이 가지고 있는 힘에 의해 복종과 순종, 사랑과 찬양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는 남녀의 차이도 없고, 이념과 사상, 지식이나 교양 그리고 도덕적, 신앙적 가치관 등등을 뛰어넘는 별개의 원리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그들이 찬양하고 순종하고 지지하는 것은 힘이 지키고자 하는 바른 가치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것이 자기를 압도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소외의 문제는 자기 통제력의 상실로부터 비롯된다. 만약 외부의 영향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개인에게 작용한 것이라면, 이는 개인의 의지를 넘어서는 것일 수도 있다. 이와 달리 의존의 문제는 자기 상실이 원인이라는 점에서, 좀 더 근원적으로 개인의 성향 혹은 의지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처음의 글로 돌아가서,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나만은 예외가 되겠지". 이러한 생각은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착각 혹은 희망사항에 불과할 수도 있다. 불행하고 비극적인 사건 사고는 처처에서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어김없이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는 까맣게 잊고 지낸 과거로 인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가운데, 현재가 곤란한 지경에 처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문제는 자신이 소외된 상태인지, 누군가에게 종속된 상태인지, 혹은 심리적 의존 상태인지를 명확하게 인지 못하는 데에 있다. 동시에 자신의 문제를 주체적인 존재로서 스스로 통제를 할 수 없는 상태로, 타인의 통제와 지배를 받는 처지에 있다면 더욱 문제다.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은 굳이 무작위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현상뿐 만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기획된 미래도 마찬가지다.


만약 개인의 주체적 통제력이 상실된 상황 아래에서, 무언가 인위적으로 통제되고 기획된 미래가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경우에, 그 기획된 내용을 미리 아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자가 아닌 한, 오직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개인 혹은 집단의 마음먹기, 즉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다는 것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앞서 탈레브의 글에서 재인용한 '러셀의 칠면조 비유'가 여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미래를 예측하고 가늠할 수 없다는 점에서, 행복과 마찬가지로 불행이나 비극적인 사건 혹은 사고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과 의사며 심리학자로 나치의 죽음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경험과 통찰을 집약하여 의미 요법(로고 세러피)을 창시한 빅터 프랭클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마지막 자유다. 그 자유는 어느 누구도 뺏을 수 없다'라고 통찰하였다.


여하튼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소외 혹은 의존의 문제에 있어서 나는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여러 조각들을 가지고, 섣부른 예상이나 추측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치 앞일을 모르는 게 사람이다.  세상사에서 나와 상관없는 일은 없다는 것 정도는 일상의 경험으로 나는 이해한다. 그 때문에 웃기도 하고, 때론 분노도 하며, 때로는 슬픔에 젖기도 하고 더불어 행복해하기도 한다. 바람이 불면 누구나 예외 없이 바람을 맞기 마련이다. 비극을 원해서 맞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겪는 비극이 내일은 내 차례가 되지 않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마르크스가 개념 지은 소외의 문제는 내 현실의 실제 삶과 아주 가깝다. 보봐르의 글은, 예외가 될 수 없다는 현실적 인식에서 내가 현재 직면한 소외와 의존의 문제를 아프게 건드린다. 꿈꾸는 것은 언제나 희망적이고 고상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현실은 마음먹은 대로 쉬이 되지 않고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만일 누군가가 내가 가진 자율성을 1~10까지 나누고 해당되는 부분을 짚으라고 한다면, 어쩌면 거의 절반의 절반 이하(0~3)의 바닥에 가까운 어느 부분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때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때도 있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의존하고픈 간절한 생각이 종종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단지 다른 사람을 향하여 그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표현하지 않으며, 구차한 손을 내밀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온전함으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희망과 고민을 포기하거나, 또는  내가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소외의 문제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삶의 시련에 봉착하더라도 자기만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 '자기만의 분명한 삶의 의미를 지향하고자 하는 의지'다. 빅터 프랭클의 말이다..(2016.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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