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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Jun 06. 2018

광자(狂者)와 견자(狷者)

"공자가 말하길, 중행(中行)을 할 수 있는 선비와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면, 반드시 광자나 견자와 더불어 함께 할 것이다. 광자(狂者)는 진취적이고, 견자(狷者)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 "(논어 자로편)

※논어주소(論語注疏): 이 장(章)은 공자(孔子)께서 당시 사람들이 순일(純一,다른 것이 섞이지 않고 한 가지로만 되어 있음) 하지 않음을 미워하신 것이다. 중행(中行)은 행실이 중도(中道)에 맞는 자이다. 이미 행실이 중도에 맞는 사람을 얻어서 그와 함께 거처할 수 없다면 반드시 광견(狂狷)한 사람을 얻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광자(狂者)는 선도(善道)를 향해 힘써 나아가서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은 모르고, 견자(狷者)는 절조(節操)만을 지킬 뿐 하는 바가 없어 나아가야 하는데도 물러난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모두 중도(中道)를 얻지는 못하였으나 성품이 항상 한결같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을 얻고자 하신 것은 당시에 진퇴(進退, 당연히 나아가야 하는데 물러나고 물러나야 하는데 나아가는)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 성정이 항상 한결같은 사람을 취하신 것이다.

※논어집주(論語集注): 행(行)은 도(道)이다. 광자(狂者)는 뜻은 지극히 높으나 행동이 말을 가리지 못하는 것이요, 견자(狷者)는 지식은 미치지 못하나 지킴(행동)은 유여(모자람이 없이 넉넉함)한 것이다. 성인은 본래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 가르치려고 하였으나 이미 얻을 수 없고, 한갓 근후하기만 한 사람을 얻는다면 반드시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일어나 훌륭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광자나 견자를 얻어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이들은 그래도 지조와 절개를 인하여 격려하고 억제하여 도에 나아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요, 끝내 여기에서 마칠 뿐임을 허여(인정하고 허락함) 한 것은 아니다.


인용한 문장은 공자께서 대의(大義)를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논한 글이다. 아울러 도(道)를 힘써 가르칠 수 있는 바탕을 가진 사람이 어떠한 유형의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제시한 글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공익의 차원에서 바람직한 인간상이 어떤 유형인가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인간관계의 측면에서는, 어떤 유형의 사람이 서로 '이우보인(以友輔仁)'하는 진실된 벗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인가를 일깨워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공자는 바람직한 인간 유형을 차례대로 중행자(中行者, 행실이 중도에 합당한 자), 광자(狂者), 견자(狷者)의 수순으로 꼽았다. 넓은 의미에서 중행자(中行者)는 인품과 학식이 높고 깊으며 아울러 실천의 면에서도 언행이 일치하는 소위 군자(君子)에 해당하고, 나머지는 군자에 버금가는 가능성 있는 인물 유형에 해당된다.


광자(狂者)의 광(狂)은 '미치다'의 뜻이 아닌, '기세가 세고 사납다', 혹은 '경솔하다', '성급하다''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광자는 높고 큰 뜻을 지닌 사람이다. 뜻을 위해서라면 전후 좌우를 가리지 않고 나아가는 적극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첫 마음을 변개치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요즘 말로 하자면 열정을 가진 진짜 진보다. 하지만 막상 그의 삶에서 실행의 결과물을 보면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실천보다 말이 더 앞선다. 그래도 마음에 큰 뜻을 잊어버리거나 변개치 않는 지조가 있는 사람이다. 


견자(狷者)의 견(狷, 성급할 견)은,  '고집이 세고 지조가 굳다',  '의심하여 주저하다'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견자가 높은 뜻을 가지고 첫 마음을 변개치 않는 것은 광자와 비슷하다. 하지만 의리와 도덕적 감정의 호불호가 뚜렷하며 고집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불의한 것, 싫은 것, 더러운 것, 도리에 어긋나거나 경우에 맞지 않는 것은  일절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발이 더러워질까봐 진흙탕 길을 피하는 사람이다. 행여 마음이 불의하고 더러운 것에 물들까봐 그러한 것들을 외면하고 멀리하는 사람이다. 
대의보다는 일신의 수신 보양에 더 무게중심을 두는 소극적인 사람이다. 그럼에도 견자는 지조뿐만 아니라 절개가 분명한 사람이다. 도덕적인 면에서는 광자보다 견자가 앞서는 듯이 보인다. 요즘 말로 하자면, 도덕적 성향이 뚜렷하고 사람됨의 도리를 잘 알고 지키는 진짜 보수(진보)다. 


그런데 광자와 견자의 특징을 살펴보노라면, 둘 다 결점이 있는 사람들이다. 광과 견의 훈(訓)에는 둘 다 '성급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한쪽은 쉽게 나서고, 다른 한쪽은 가리는 것이 있어 쉽게 나서지 못한다. 한쪽은 실속이 없고 다른 한쪽은 독선적으로 고집스럽다. 이 둘의 또 다른 공통점은 지조다. 변함이 없이 한결같음이 그 공통점으로 찾아진다. 공자는 양쪽 다 현실적으로 큰 뜻을 이루기에는 다소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통찰했다. 부족하기에 가르침으로 그러한 결점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 가능성의 유일한 근거는, 처음 가졌던 뜻을 변개치 않는 굳센 지조에 있다. 뜻을 변개치 않는 한결같은 마음에서 비로소 희망이 찾아진다. '졸렬' 이란 말로 성정(性情)을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공자는 대의를 이루는 일에 공자가 마땅히 함께 할 사람으로 중행자(中行者)를 꼽았다. 즉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를 지키며 융통성 있게 시의적절한 권도(權道)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 없다면, 차라리 열정과 지조를 가진 광자를 택하고, 광자마저 없다면 차선으로 다소 소극적이지만 지조가 있고 고집스러운 절개를 가진 견자를 택하겠다는 것이 공자의 혜안이다. 이들에게서 향후 가르침의 여하에 따라 중도자에 이를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공자의 사람을 이해하는 이러한 혜안은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비록 동일한 주제 혹은 개념일지라도 각 개인의 기질 특성과 성향, 그리고 처한 상황에 따라 그 가르침이 제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요즘 선거철이다. 흔히 하는 말로 돌팔이가 있다. 돌팔이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전문적인 실력과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전문직에 종사하여 돈벌이를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돌팔이 의사, 돌팔이 무당, 돌팔이 약사 등 특정 전문 직업군에 주로 사용된다.  이와 비슷하게 혼동하여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말이 있다. 사이비다. 사이비는 '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름. 또는 그런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는 진짜가 아닌 가짜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개 돼지 혹은 원숭이가 사람 비슷한 모양으로 꾸미고 사람 행세를 한다면, 그것이 곧 사이비다. 늑대가 양의 탈을 쓰고 선한 목자의 행세를 한다면, 이는 곧 
사이비다. 뒤로는 온갖 더럽고 추악한 짓과 불법을 마다않는 사람이 밖으로는 그럴듯하게 자기를 포장하여 도덕군자의 행세를 하고 있다면, 이가 바로 사이비다. 도적이 경찰관이나 판검사 행세를 한다면 이는 사이비다. 꼭두각시 인형이 사람 행세를 한다면 이는 사이비다.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기득권 집단이 언론의 모양새를 갖추고 언론 행세를 한다면, 사이비다. 범법자가 도덕적이고 거룩한 모양새를 하고 부처나 예수의 행세를 한다면, 이는 사이비다. 물론 인간이 신의 행세를 한다면 당연히 사이비다. 

가짜가 진짜를 흉내 내는 가장 큰 이유는 진짜가 대단히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인류의 오랜 삶의 경험에서 그리고 세간에서 보편적으로 평가되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을 초월하는 신은 대단히 각별하고 특별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이비가 특히 종교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를 분변 하는 가장 큰 특징은, 살아 있는 인간의 신격화와 맹목적인 믿음, 그리고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에 있다.

이렇듯 사이비는 본질에서 근본적으로 그 속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그것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돌팔이는 여기저기를 다니며 하는 일로 남을 속여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사기적인 것이고, 사이비는 그 속성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그럴듯하게 남을 속여 개인 혹은 집단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좀 더 진화된 차원의 사기이다. 사이비 종교, 사이비 목사, 사이비 승려, 사이비 도인, 사이비 종교인, 사이비 이론, 사이비 과학, 사이비 정치인, 사이비기자, 사이비 전문가, 사이비 박사, 사이비 학자, 사이비 선생... 기타 등등  여러 경우에 사이비라는 말을 감히 사용할 수 있다. 성인 공자가 유일하게 회피하고 거부하며 미워하는 인물형인 향원이 바로 사이비다. 세상의 평판에 연연하며 덮어놓고 세상에 아첨하는 자가 바로 향원이며,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하여 덕을 어지럽히는 자가 바로 향원이며 곧 사이비다. 

선거철에 사이비가 처처에 보인다. 민주주의에서 투표는 국민을 대리하여 정치를 하는 정치인을 뽑는 장치다. 그럴진대 민의를 대리하지 않고, 국민과 정치를 자신의 부귀영달과 사리사욕을 채우는 도구와 수단으로 삼는 인물을 뽑을 수는 없는 일이다. 최선의 인물이 보이지 않고, 차선의 인물마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이비를 뽑을 수는 없는 일이다. 허물과 결점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명백한 범법의 전과가 있는 도적을 창고지기 곳간지기로 뽑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지난 정권들이 만들어낸 철옹성같이 겹겹이 쌓여 있는 적폐의 현실적 결과물들은 이미 눈으로 확인되고 있는 현실이다. 마치 손대기 싫을 정도로 혐오스러운 쓰레기 더미같이 악취를 풍기는 흉물스런 거대 야당은 그 명백한 증거다. 반평화, 반민족, 반사회, 반민주, 반정의, 반평등, 반자유, 매국, 몰상식, 몰염치, 공공의 적 등등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하기가 부족하다. 눈이 있다면 양식이라는 게 있다면 마땅히 생각해 볼 일이다.

사람을 선택함에 있어서, 광자와 견자에 대한 공자의 혜안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최선이 없으면 차선을 뽑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성인 공자도 최선이 없는 경우, 다소 결점이 있더라도 개선의 가능성과 희망이 있는 차선과 차차선을 택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선택이 가능해지는 것은, 위대한 성인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변화와 성장 가능성에 있다. 그러할진대 차선도 차차선마저도 없다고 해서, 미워하거나 혹은 싫다고 해서, 차악을 선택하는 것은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다. 차악은 정도의 차이일 뿐 단지 악일 따름
이다. 다시 말하지만 허물이나 결점이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선도 차선도 차차선마저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속한 공당의 지도자의 올바른 가치관과 국가관, 그리고 그 실행력이 현실로 드러난 훌륭한 리더십을 보고 선택하는 것이 바로 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이 광자와 견자의 사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이 아니겠는가.


선택의 기로에서 악을 선택하고 그 결과로 실제로 그 죄악의 행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선한 것(옳은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심리적 경향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 사르트르는 "잘못된 믿음(mauvaise foi)"이라고 정의했다. 자기기만이 이에 해당된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인지부조화'로 설명한다. 조지 오웰의 '이중사고'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 있다.  이것이 될까 저것이 될까를 선택하는 것,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선택하는 것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악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항상 선한 것이며, 그 어떠한 것도 전체적으로 선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선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이는 '잘못된 믿음'의 근본적 이유를 설명하는 사르트르의 통찰이다.  (20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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