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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Mar 27. 2018

거짓말

"기만(deceit, 속이는 것)과 폭력(violence), 이것은 의도적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두 가지의 형태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남을 속일 때, 우리는 우리가 믿지 않는 것을 타인들이 믿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호도된 메시지를 전한다. 제스처를 통해서, 표정과 태도를 꾸밈으로써, 암시적인 행위 혹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심지어 침묵을 통해서, 그렇게 우리는 거짓말을 전할 수 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망하게 되어 있다."-시셀라 복(Sissela Bok, 『Lying: Moral Choice in Public and Private Life』,2011)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수인번호 716번으로 불리는 전직 대통령 MB가, 10년 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외쳤던 말이다. 자기를 향한 모든 소문들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외쳤던 그가 집권한 이후로, 시셀라 복의 예단처럼 우리 사회는 거의 망할 단계에 봉착했다. 그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인류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촛불 혁명을 통해, 온전히 각성된 국민의 힘으로 망해가는 우리 사회를 다시 살려 놓았다. 다양한 언론매체들에 의해 공표된 바로는, 그는 잡범 수준의 전과 11회라는 형사처분 범죄 이력을 가지고 있다. 조만간 치명적인 범죄 이력이 하나 더 추가되어 12회가 될 것이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자화자찬하던 그의 가훈은 '정직'이요, 종교적으로 교회 장로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역설이다. 수인번호 716번은 촛불 혁명이 가져다준 필연적인 결과물 중의 하나다. 사필귀정, 격세지감이란 옛 한자성어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언론과 정치 경제 교육 종교의 사회지도층을 중심으로 여전히 후안무치하고 고질적인 거짓말의 잔재들은 악성 바이러스처럼 우리 주변의 곳곳에 잠복하고 있다. 최근의 미투 운동도 예외는 아니다. 미투 운동이 지향하는 그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서, 남성과 대립하는 여성운동 혹은 마땅히 밝혀져야 할 또 다른 사회적 범죄의 진실을 가리거나 덮어버리는 대중 기만 내지는 호도의 수단 혹은 오직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이해관계의 도구로 이용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얼굴도, 그 얼굴 속에 들어 있는 생각도, 심지어는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 즉 삶 자체가 온통 거짓으로 윤색된 것 같은 인생들도 많이 보인다. 이러한 거짓들이 사회 전체에 악성 바이러스처럼 퍼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불멸'에서 현대의 인간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논리적 사고 체계나 이성이 아니라 '이마골로기' (imagologie)라는 이미지의 지배, 즉 일련의 이미지들과 결합된 암시와 감성이라고 적고 있다. 이마골로기는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를 합성한 단어다. 이마골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보이는 것과 실상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에서, 특히 계획적인 의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거짓말은 일상적으로 익숙한 것이고 또 당연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익숙한 것이 누군가의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로 공론화되는 순간 믿기 어려울 만큼, 엄정하고 가혹한 판단과 정죄의 대상으로, 가차 없이 낙인찍힌다는 것은 그야말로 역설이다. 갖은 명분과 논리를 전개하며, 마치 자신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듯이 도덕적 태도를 취하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정작 특정 이익을 위해 일반 대중을 상대로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하는 사회적 강자에 대해서는 묵인하거나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중적인 사고를 보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거짓말 혹은 관습적으로 도덕적 금기가 되는 어떤 일이, 어떤 사람에겐 사회적으로 묵인되거나 허용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심각한 범죄행위로 인식한다는 말이다. 정작 번번히 도덕적으로 지탄받거나 지탄해야만 할 정도로 거짓과 불법과 불의가 상습적인 어떤 사람은 버젓히 사회 기득권으로 건재하고, 어떤 사람은 감추었던 혹은 잊혀졌던 자신의 부끄러운 도덕적인 문제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곧바로 사회적으로 단죄되어 강제 퇴출되고 매장되거나, 혹은 자기 양심에 못이겨 자폭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한 비도덕적 인간만이 무한경쟁에서 살아 남아, 사회적 강자로 군림하는 도덕적 사회. 비도덕이 일상적인 자들이, 마치 일반 대중의 도덕적 자율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조롱이나 하듯이, 사회적 강자의 위치에서 뻔뻔스럽게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는 정의롭고 평등한 자유민주사회, 이 또한 역설이다. 


알다시피 도덕에 관한 문제는 비록 개인적으로는 묵인할 수 있는 사안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면 사회 경제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심각한 문제보다, 더 쉽게 대중의 감성과 이성을 자극하고 폭발시킨다. 왜 그럴까?  개인적 혹은 사회적으로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겠지만,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찾아 보자면,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부분에 대한 무의식적인 수치감 혹은 죄책감이 외부의 문제로 그대로 투사되기 때문이다. 즉 타인의 잘못된 행위를 비난하고 정죄함으로써 자기 내면의 문제를 남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방어기제라는 심리현상에 의해서 자신의 약하고 어두운 내면의 문제를 합리화하고 보호하는 차원에서 비롯된다.


만일 타인에게서 드러난 악한 모습이 못 견딜 정도로 화가 나고 혐오스럽다면, 그것은 감추어지고 드러나지 않은 내 모습일 수도 있다.  만약 타인의 잘못된 행위를 전후 사정 따지지 않고 도덕적으로 판단하여 비난하고 정죄해야만 속이 풀리는 것이 일상적이라면, 그것은 곧 자신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셈으로 자기 얼굴에 침 뱉은 행위와 같다. 마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식'이요, 요즘 은어로 소위 '내로 남불'이다. 단지 자신이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사실을 가리고 진실을 호도하는 악성의 거짓말은 무엇보다 각종 언론 미디어를 포함하여 영향력과 책임이 있는 사회지도층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도스도옙스키는 그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또 자신의 거짓말을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의 진실을 인식하거나 분별할 수 없다.'고 쓰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사회 정치적 관점에서 '악의 평범성'을 논하면서 전체나 집단의 문제를 넘어서 개인의 책임문제를 거론한다. 즉,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타인의 입장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는 것, 즉 '사유의 무능력, 판단의 무능력, 말하기의 무능력'이라는 총체적 무능력이 곧 악의 바탕이요 죄라고 통찰했다.


미투 운동의 변질은 무엇보다도 먼저 언론의 책임이 크다. 과거 재벌과 정치권력과 기득권의 나팔수와 마름질을 마다하지 않았고 국민의 눈과 귀, 최소한의 알 권리를 앞장서서 가로막고 진실을 호도했던 언론 말이다. 과거와 달리 시민의식이 깨어나고 정치환경도 확연히 바뀌었지만, 언론은 여전히 과거의 행태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듯하다. 미투 운동과 관련하여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여타의 성추행 폭로 사건과는 달리, 정작 미투 운동에 용기 있는 도화선을 댕긴 서모 검사의 사건은 진상조사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추이를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상태다. 언론은 이상하리만큼 침묵하고 있다. 미투 운동의 변질은 적폐 청산의 과정에서 우선하여 언론 적폐의 청산이 반드시 선행되고 개혁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세월호와 촛불집회를 계기로 각성한 일반 대중에게 확인시켜 준다.. 


"거짓은 사람을 혼돈시킨다. 악한 사람들은 '거짓의 사람들'이다. 자기기만을 켜켜이 쌓아 올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또한 속이는 사람들이다.... 악한 사람들의 도덕성을 이해하는 데는 '이미지', '외형상',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말들이 퍽 중요하다. 그들은 선해지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겉으로 선해 보이려는 욕망은 불처럼 강하다. 한마디로 그것은 거짓이다. -M. 스캇펙( Mogan Scott Peck) , 「거짓의 사람들, p86~p101」(윤종석 옮김, 비전과 리더십, 2007)


거짓말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 대어 말을 함. 또는 그런 말.'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거짓말이 나쁜 것이고, 또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린아이들도 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또는 열등감을 감추거나 수치심을 모면하기 위해 혹은 여러 가지 이유들로 거짓말들을 종종한다. 상대를 배려하고자 하는 선한 의도의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속일 수밖에 없는 처지도 있다. 다양한 상황이 있겠지만 대표적인 예를 들면, 전쟁, 외교, 협상, 경쟁 등등의 상황이 그렇다.


성서의 시편 기자는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다'(시편 116:11)라고 외친다. 굳이 여러 논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거짓말은, 인류의 전 역사에 걸쳐서, 거의 모든 인간의 삶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주요한 특성이다. 욕구 혹은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 본능이다. 스스로 수치스럽고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을 숨기고 감추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는 자기보호본능에 속한다. 그러나 아무리 거짓말이 자기 보호본능에 속한다 할지라도,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즉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자기보호본능은 단순한 이기심의 발동에 불과하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다. 본능은 자율적 통제의 대상일 뿐, 외적이든 내적이건 간에 억압이나 간섭의 대상 혹은 혐오의 대상 혹은 제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본능이 양심과 의지라는 내면의 자율적 통제 체계가 아닌 외부에서 규정한 가치체계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판단되고 억압되고 정죄될 때, 인간의 내면은 병들기 시작한다. 다만 본능에 의해 드러난 잘못된 행위에 대해 비판 혹은 비난을 하는 것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며, 또한 그 결과에 대해 개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반면교사 삼아 자신을 성찰하고, 필요하다면  자기 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자 하는 의지의 유무에 있다. 


거짓말을 하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꾸며서 사실인 것처럼 속이는 것, 진실을 감추는 것, 진실을 말하되 일부는 감추고 일부만 밝히는 것, 진실과 거짓을 뒤섞는 것 등등이다.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거나 빠뜨려서 말하는 것은 비록 속임수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러한 행위는 거짓말에 해당된다. 이는 후일 비난을 피하기 위한 교묘한 수단 혹은 변명거리가 되기도 한다. 영국의 시인 알프레도 테니슨은 '절반이 진실인 거짓말은 거짓말 중에서 가장 어두운 것('The Grandmother')이라고 쓰고 있다.  사실과 허구를 뒤섞어 꾸며낸 거짓말을 가장 악성으로 본다는 말이다. 뒤이은 다음 시구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전부가 다 허구인 거짓말은 명백하여 맞서 싸울 수 있지만,  일부가 진실인 거짓말은 애매모호하여 맞서 싸우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거짓말은 정신적인 문제 혹은 뇌 결함 때문에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는 이중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자신의 거짓말을 스스로 진실된 것으로 믿는다거나 자기 거짓말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특별한 경우도 존재한다. 보통의 경우, 거짓말은 자기보호본능과 자신만을 생각하는 본능에 가까운 이기심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거짓말이 결과적으로 타인을 속임으로써 사욕을 취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거나,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공공의 이익과 불특정 다수에게까지 해악을 끼칠 경우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거짓말은 범죄와 다름없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의적이고 계획된 행위에 해당된다. 어째튼 거짓말에 관해서는 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때론 무의식적으로 때로는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구별하는 방법은 의도적으로 표현된 진술이란 점에서, 진술의 구체성이 일관성과 연속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 여기엔 언어, 이야기, 행동, 태도(몸짓), 표정, 감정 등이 모두 포함된다. 만약 표현된 진술들의 다양한 조각들이 비록 각각 타당성을 가진다 할지라도, 일관성을 가지지 못하고 실제 사실의 구체적인 부분으로써 부합되지 않고 뭔가 어긋난다면 거짓일 가능성이 많다. 거짓말은 거짓을 합리화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또 다른 거짓말을 생성하기 마련이다. 어제 말 다르고, 오늘 말이 다른 식으로 수시로 말이 오락가락 변한다거나 실제 상황이 표현된 진술과 다른 사실이 존재한다면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진실의 여부는 오직 당사자만이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보존된 기억에 의존하는 순간부터 진실은 신빙성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반드시 과거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통찰했다. 프루스트의 통찰처럼, 최근의 인지심리학과 뇌신경분야의 연구 결과도 그렇다. 기억에 대한 우리의 확신과 실제 정확도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적으며, 기억의 신뢰성은 우리가 확신하는 것만큼 높지 않다고 한다. 편향, 암시, 귀인 오류 등 다양한 원인들에 의해서 기억이 쉽게 변형되기 때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1950년)은 '진실의 문제'를 마주하는 인간의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관찰이나 심리검사로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기는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심리검사로는 피검자의 부정직한 성향은 어느 정도 측정할 수 있다.  다면적 인성검사(MMPI)의 경우, 수백 개의 검사 문항 중에서 15개의 문항들로 구성된 L 척도 (Lie)로 피검사자의 부정직한 성향을 판별한다. MMPI의 모든 척도가 보편적인 경험에 의해 작성된 문항들인 반면에, L 척도만은 논리적으로 구성되었다. 논리적이라함은, 말은 되지만 실제 혹은 실행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그 내용은 사회적으로 칭송할만하고  바람직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양심적인 소수의 사람에게서만 보일 수 있는 남다른 태도나 행동들에 관한 내용이다. 이 척도의 점수가 높을수록 사고가 경직되어 있고 도덕적으로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솔직하지 못한 사람에 가깝고,  낮을수록 양심적이고 솔직한 사람에 가깝다. 


거짓말의 기원에 관련된 일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쉽게 찾아진다. 신들의 왕 제우스가 인간에게 거짓말하는 능력을 주었다. 그 동기가 재미있다. 제우스에게는 헤라라는 본처가 있다. 제우스는 본처인 헤라 몰래 숱하게 바람을 피웠다. 제우스의 거짓말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즉 제우스에게는 거짓말이 자기방어의 차원에서 필요했다. 이러한 경험에 입각하여 사람들이 자기방어의 차원에서 거짓말을 하게 만듦으로써 결국 인간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서로 불신하는 까닭에 오히려 거짓말이 정당화되고 합리화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가히 거짓말이 인간의 본성이라 할 만큼 거짓말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이 쉽게 찾아진다. 제우스 이외에 거짓말과 관련된 대표적인 신은 헤르메스다.


신들의 제왕, 제우스는 바람둥이다. 그에게는 본처인 헤라 이외에도 많은 부인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잘 아는 태양의 신, 신탁의 신으로 알려진 아폴론의 어머니인 마이아(Maia)가 있다. 마이아가 낳은 제우스의 자식으로는 아폴론 외에도 전령(傳令)의 신, 상업(교역)의 신으로 알려진 헤르메스가 있다. 헤르메스(Hermes)는 아폴론의 동생이다. 도둑과 거짓말쟁이의 교활함을 주관하는 신이기도 하다. 헤르메스가 도둑들의 수호신과 거짓말의 대명사로 추앙받은 이유가 그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한 일이 도둑질이었고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거짓말에 능하고 교활한 헤르메스를 자신의 전령으로 삼았다. 제우스 자신이 직접 나설 수 없는 난감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도둑질과 거짓말과 타협과 회유의 명수인 영리한 헤르메스를 해결사로 보냈다. 제우스가 사고를 치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어김없이 헤르메스가 나서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 수습했다. 


거짓말의 명수, 타협과 회유에 능하고 교활하고 영악한 해결사인 헤르메스의 능력이 유일하게 먹히지 않은 신이 있었으니 바로 프로메테우스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포함한 올림푸스의 신들보다 앞서 세상을 지배하였던 티탄족(거신족)의 후손이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바로 티탄족에 속한다. 제우스는 사사건건 자신의 권위와 뜻에 저항하고 인간의 편을 드는 프로메테우스를 싫어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전유물인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과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즉 인간에게 불과 도구의 사용법을 전해줌으로써 인간을 짐승과 구별되는 문명화의 길에 들어서도록 이끈 신이 프로메테우스다. 자신의 명을 어기고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것을 알게 된 제우스는 분노했다. 


제우스는 그 보복으로 인간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결심하였다. 대장장이인 아들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게 하고, 올림푸스의 신들이 그 여인에게 선물을 주라고 명령한다. 이 여인이 바로 판도라다. 제우스는 그녀에게 아름다운 항아리(판도라의 상자)를 선물로 주었다. 항아리 속에는 증오, 질투, 욕심, 잔인함, 분노, 폭력, 파괴, 굶주림, 가난, 고통, 질병, 노화 등 장차 인간이 겪게 될 온갖 재앙을 가득 담아 밀봉하였다. 제우스는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낸다. 판도라에게 첫눈에 반한 에피메테우스는 결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선지자, 선각자의 능력을 가진 프로메테우스는 판도라의 존재 이유와 판도라가 선물로 가진 항아리 속에 담긴 것의 실체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결혼을 만류한다. 에피메테우스는 후각자, 즉 뒤늦게 생각하는 자다. 에피메테우스는 형의 충고를 듣지 않고 판도라와 결혼한다. 할 수 없이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에게 판도라의 상자를 절대로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제우스의 의도대로, 호기심에 못 이긴 판도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만다. 마침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재앙이 모두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와 세상을 잠식하고, 판도라의 상자에는 희망만이 유일하게 남았다.


제우스가  사사건건 자신을 거역하고 저항하는 프로메테우스를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에게는 어두운 과거가 있다.  제우스는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죽이고 올림포스의 신들의 제왕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 크로노스의 어머니이자 제우스의 할머니인 대지의 여신 가이아로부터, “너 또한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리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배다른 자식이 수도 없이 많았던 소문난 바람둥이인 제우스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제우스의 신상(身上)에 관한 비밀을 알고 또 그 반역의 자식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바로 프로메테우스(먼저 생각하는 사람, 선각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우스는 직접 자신의 미래를 프로메테우스에게 물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대답을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제우스는 당장 헤파이스토스를 불러 청동 쇠사슬을 만들게 하고, 크라토스(권력)와 비아(폭력)를 시켜 코카서스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에다 묶어 버렸다. 그것으로도 분이 안 풀린 제우스는 독수리로 하여금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파먹게 했다. 독수리가 간을 파먹으면 그때마다 간은 새로이 돋아나는 무한 고통을 주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분노가 가라앉은 제우스는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자, 유능한 해결사 헤르메스를 보내 프로메테우스를 회유한다. 할머니 가이아가 제우스에게 내린 저주 예언의 비밀을 알려주면 형벌에서 풀어주고 큰 보상까지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오히려 자기 신념을 저버리고 일신의 안락함을 위해서 타협하는 행위 자체를 경멸하면서 거절했다.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훗날 제우스의 동의를 얻은 헤라클레스가 프로메테우스를 풀어줄 때까지 무려 3천 년 동안 형벌을 받았다. 거짓말과 타협과 회유의 명수인 헤르메스의 능력도, 대의와 신념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여 비굴하게 살기를 거부한 프로메테우스에겐 무용지물이었다. 


"신화는 인간을 벗긴다. 아무것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인간의 원시를 보여준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날것들을 신에게 뒤집어씌운 이야기다. 동시에 인간의 미덕과 통찰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이며, 상징을 통해 벌거벗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 신화에서 찾은 '다시 나를 찾는 힘’』) 


헤르메스의 회유와 프로메테우스의 신념, 그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생각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말이든 각오든 신념이든 상황에 직면해 봐야 비로소 본심을 안다. 나는 프로메테우스의 정신을 상기하며 동시에 끊임없이 헤르메스의 회유를 떠올린다. 이러한 양가적이고 극단적인 갈등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떨쳐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간에 책임 있는 사회적 공인들과 언론들의 후안무치한 거짓말들과 곡학아세의 근원을 찾아가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갈등의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거짓말은 결국 주체가 되는 사람이 의지적으로 선택한 결과물이다. 일신의 안락함과 부귀영화를 위하여, 도리 혹은 신념 혹은 양심을 저버리고 현실적인 이익과 타협한 결과물이라는 말이 되겠다. 다시 말하면, 거짓의 사람으로 살 것이냐? 인간다운 사람으로 살 것이냐? 는 주체가 되는 개인 자신에게 달려 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죄요, 악이요, 고의적인 무능력이다. 여기엔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것도 포함된다. 비록 거짓말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할지라도 적어도 온 세상이 그리고 자신이 비난하고 정죄하는 거짓의 사람 부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어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 유홍준 교수의 말이다. 배움은 끝이 없고, 경계 또한 없다. 부단한 배움의 자세를 가지고 올바른 사유의 능력을 키우고자 하는 노력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지식은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단순한 정보에 불과할 뿐, 사리를 분별하고 올바르게 판단하는 지혜로 확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의 세계에 명백하게 드러난 거짓에 반응하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대리만족의 수준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면교사로 삼아 자기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성찰하고, 필요하다면 자기 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의지를 갖는 일 또한 중요하다 하겠다. 아무리 옳고 바른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실천하고 한결같이 지키고자 하는 굳은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한갓 장식용 악세사리같은 희망사항에 불과할 따름이다.


장황한 글을 맺으면서 한발 물러서서 보니, 말과 실제와 그리고 실천이 종종 어긋나는 나는, 거짓말의 범주와 속물적인 인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말 그대로 용렬하고 졸(拙)한 사람임이 여실히 느껴진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스스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감추고 때론 포장하기도 한다. 숱하게 후회도 하고 결심도 하지만, 결국은 다람쥐 챗바퀴 돌듯이 제 자리로 돌아올 때도 있다. 다만 의도적으로, 아닌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서 타인을 기만하거나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여 내 것으로 취하지 않을 따름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으로 인정하고 문제의식을 갖는 것에서 부터 회복과 치유는 시작된다고 한다. 판도라의 상자에 희망이 남아있다는 것은 나름의 위안이다. 다시 헤르메스와 프로메테우스를 생각한다.  '명예는 밖으로 나타난 양심이고, 양심은 내면에 깃든 명예다.' 쇼펜하우어의 말이다.(2018.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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