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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Feb 04. 2018

내 마음속의 보배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바탕은 변함이 없고, 버드나무 가지는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到千虧餘本質 柳經百別又新枝, 월도천휴여본질 유경백별우신지)" -김구 선생(1876∼1949)께서 쓴 휘호


사람의 본바탕에 관하여 희망을 가지게 하는 김구 선생의 휘호는, 암살당하기 4개월 전인 1949년 2월 독립운동가 손정채 선생의 딸 손승월 씨에게 써 준 글이다. 2008년 1일 21일 세상에 공개되었다. 휘호로 쓴 글의 출전은 출처불명 작자미상이다. 


인용한 문구의 출전은 찾아지지 않는다. 인터넷 혹은 일부 인문학 작가들의 글에서 상촌 신흠의 시(詩)의 일부로 선생의 문집 상촌집에 수록된 '야언(野言)'이 그 출전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야언에는 저런 글귀가 없다. 당연히 위의 글귀 앞에 붙는 '동천년노항장곡(桐千年老恒藏曲),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도 마찬가지다. 상촌 선생의 '야언(野言)'을 읽어봤으면 저런 주장은 감히 못한다. 심지어 신흠(1566~1628) 보다 한 세대 앞서 사셨던 퇴계 이황 선생(1501~1571)이 위의 글귀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주장에 이르면 그만 말문이 막힌다. 


어째튼 인용한 글귀는 사람이 가진 마음 바탕의 중요함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아니한다.'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글귀다. 양촌 권근 선생의 글 '보암기'(寶巖記) 중에, "옛 성현들이 보배로 여긴 것은 오직 어진 것(賢)과 오직 선한 것(善)이다. 그러한 어짊(賢)과 선함(善)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겉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그것이 곧 인(仁)이다. 그러므로 진정 보배로 여길 것이 내 밖의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나에게 있는 것이다"라는 의미의 글이 보인다. 


이는 논어에서 공자가  '참으로 인(仁)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마음속에 악함이 싹트지 않는다'(苟志於仁矣 無惡也)는 가르침과 직접 연결된다. 논어 주소에 이를 해석하기를, '진실로 인(仁)에 뜻을 두면 그 밖의 행동에 끝내 악행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양촌 선생의 통찰은 공자의 가르침과 함께 자연스레 김구 선생의 휘호를 연상시킨다. 그 핵심어는 인(仁)이다. 이로써 내가 보배로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공자는 인(仁)을 가르칠 때,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짓지 않았다. 공자는 사람들의 성격특성과 성향에 따라 각각 다르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에 대한 해석은 아주 다양하다. 주로 인간관계적 측면에서 실천을 강조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己所不欲 勿施於人), '어려운 일을 먼저 솔선하여 감당하되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先難而後獲 可謂仁矣),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其言也認),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특성으로 '공손함(恭) 너그러움(寬) 신뢰성(信) 민첩함(敏) 은혜를 베푸는 마음(惠)의 다섯 가지를 들었다. 


다산 정약용은 '인(仁)이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며(凡人與人盡其道, 斯謂之仁),  인(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행위로 일이 이루어진 이후에 성립한다'(仁之名, 成於行事之後)고 해석했다. 단순히 마음속에 품고 있다고 해서 혹은 말이나 글로써 표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인(仁)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마음으로부터 선하고 어진 것이 우러나와서 행동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인(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다산선생 역시 실천의 의미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인자(仁者)는 뜻 그대로 어진 사람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인(仁)을 자연스러운 행위로 실천하는 사람이며, 이는 곧 사람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인(仁)을 자랑하거나 과시하거나 자기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남에게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다. 공자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이다.   


우리는 보통 '어진 사람' 하면 단순하게 두루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좋은 사람을 연상한다. 그러나 공자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람은 '향원(鄕愿)'에 해당된다. '향원'은 공자가 미워한다고 천명한 부류다. 선한 사람과 선하지 않은 사람은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고 꿰뜷어 본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일관된 기준 없이 상대에 따라 좋게 인정받기 위해 평판과 호의를 구걸하는 자일 것이다. 따라서 향원은 주관이 분명치 않으며, 속과 겉이 달라서 실제로는 덕이 없으면서 덕이 있는 척하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래서 공자는, “향원은 덕의 도적이다.”라고 단정 짓는다. 맹자는 이를 해석하기를 향원이 해로운 것은 사람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바른 것을 어지럽히고 혼란을 주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공자는 말한다. "오직 인자(仁者)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논어 집주에, "사심(私心)이 없는 뒤에 좋아하고 미워함이 이치에 맞을 수 있는 것이니, 정자(程子)가 이른바 그 공정(公正)함을 얻었다는 것이 이것이다". 또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함은 천하(天下)의 똑같은 심정이다. 그러나 사람이 매양 그 올바름을 잃는 것은 마음이 매여있는 바가 있어서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인자(仁者)는 사심(私心)이 없으니, 이 때문에 능히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어진 마음이 바탕에 없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리사욕에 흐르기 때문에 공평하지 못하여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오직 어진 사람만이 개인적인 이해관계(利害關係)나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공정한 마음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남을 좋아할 수도 있고 또 미워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되겠다.


속담에 '조개껍데기는 녹슬지 않는다', '길이 멀면 말(馬)의 힘을 알고 날이 오래면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말이 있다. 어질고 선한 사람은 누구나 바라는 바이다. 하지만 그 바라는 마음에 앞서 내 마음의 본바탕이 어떤지 또한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쯤은 살펴볼 일이다. "말을 교묘하게 잘하고 얼굴 빛을 보기 좋게 꾸미는 자 중에 어진 사람이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라고 공자는 말한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사람은 몸소 겪어봐야 비로소 안다. 그 사람의 본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상황 혹은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고 꿈꾸는 것은 우리 모두의 자유다. 비록 자신의 실체가 내가 희망하고 꿈꾸는 것과 다르다 할지라도 그렇다. 


"본질적인 것은 마음으로부터 샘솟듯이 우러나와야만 한다. 인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이 자신의 본질을 도외시하고 다른 것들을 바꿈으로써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일생을 헛수고로 낭비할 것이며 그가 없애고자 했던 비통함(the grief)을 더욱 크게 키우게 될 것이다."

-새무엘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 「Rambler #6, 1750」)


다시 김구 선생의 휘호를 복기해 본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바탕은 변함이 없고, 버드나무 가지는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이로써 내가 마음속에 보배로 여기는 것이 과연 내 안의 것인지, 아니면 밖의 것인지 따져볼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진정 자문해 볼 일이다. 달처럼 비록 그늘에 가릴지언정 본래의 형상이 변함이 없고, 버드나무처럼 아무리 꺽일지라도 꺽였던 자리에 한결같이 새 가지가 돋아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말이다.(20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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