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길섶 한편으로 뭔가 반짝이는 흰 것이 보인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서 보니 사기대접 몇 점이다. 언뜻 보기에 멀쩡해 보인다. 고급스러운 문양으로 보아 꽤 고급스러운 것 같다. 자세히 보니 대접 가장자리에 이빨이 듬성듬성 빠져 있다. 길섶에 버리는 그 심정은 생각할 가치는 없다. 하지만 버린 이유는 분명히 알 것만 같다.
어제는 어떤 일의 계기로, 얼마 전에 읽었던 이재무의 시인의, "저러다 연줄 놓으면 연 다 할 것이다"라는 시의 한 구절이 뜬금없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때문에 잠시 쓰잘데 없는 생각에 잠깐 잠긴다. 옛 속담에 '사발 빠진 것 같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쓸모가 없어서 그대로 두기에 불편한 물건, 혹은 담고 있기에 은근히 불편한 심정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 그냥 두기엔 공간만 차지하여 불편하거나, 부담만 주는 물건은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럼에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버리지 못하는 그 까닭이 뭔지는 이해 당사자만 안다.
내 아이들이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연락을 한다. 그 내용의 핵심은 한결같다. 서로 안부를 확인한다. 그 이외의 사람들이 드물게 가끔 연락을 하는 것은 안부보다는 도움이나 요청, 혹은 의견을 묻는다. 주로 개인적인 사안(事案)에 대한 것이고, 안부는 2차적이다. 흉금을 허물됨 없이 터놓는 가까운 사이를 제외하고 적어도 내게 지인들이라 특정함은, 일 년 내내 무소식 이다가도 특별한 날 만큼은 서로가 잊지 않고 어지간하면 안부를 주고받는 관계를 말한다. 설사 잊더라도 미안함과 같은 어떤 감정들이 개입할 전혀 여지가 없다. 그냥 자연스럽다. 그래서 만나면 내 자식을 보듯 그냥 반갑다. 그냥 편하다. 그 패턴은 모두들 한결같다.
그렇게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그렇게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 않아도, 한결같이 자연스럽고 편한 까닭은 비록 외적이나마 서로에 대해 구체적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서로에 대한 오랜 신뢰 혹은 존경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까닭이다. 그 외에는 인간관계라기보다는 일상사적인 사회적 이해관계일 따름이다. 거기에도 자연스러움이 물론 존재하는 것은, 감정개입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아주 가끔 신뢰관계가 불안정하거나 서로를 잘 알지 못할 경우, 서로의 취향을 떠나서 사람이든 자리든 왠지 모르게 불편해지거나 부담을 느끼게 되는 공간과 지점이 있다. 거기에는 우리가 잘 알 수도 없고 또 설명할 수 없는, 당사자만이 갖고 있는 어떤 이해관계가 감정적으로 얽혀 있는 지점이다. 그냥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버리면 된다. 그런데 그게 쉽게 안된다. 그것이 서로 인간적인 신뢰를 주고받아야 할 대상이라면 그 느낌은 색다른 심리적 무게로 다가온다.
동물은 단순히 주어진 상황에서 생존본능을 향한 욕구로써, 대상이나 사물에 대해 호기심이나 관심을 갖는다. 즉, 동물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생존과 본능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 호기심과 관심을 유지한다. 반면에 인간의 호기심과 관심은 동물이 갖고 있는 본능적 생존의 차원, 욕구 충족이나 자기보호의 차원과는 그 성격이 자뭇 다르다. 인간의 호기심은 ‘생존’과 ‘보호', '이해관계’의 차원을 넘어서 ‘배움’의 욕구와 연결되며, 관심은 사회적 욕구와 관련된 '관계'와 연결된다. 이 둘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호기심이든 관심이든 그것이 감각적이고 감정적 차원을 떠나 의지적인 차원으로 상승하여 그 욕구가 계속 지속될 때에만 성장하고 발전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호기심은 '배움'이 되고, 관심은 보편적인 의미의 '사랑'으로 그 생명력을 키우며 마침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인간다움이 확장하는 것이다. 만일 호기심과 관심이 동물적 차원에서만 머무르고 더 이상 발달이 안된다면, 마치 정신적 성장을 멈춘 어린아이와 같다. 정상적인 아이라면 어떤 사물이든 뭐든 간에 호기심과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마음에 들면 그것을 갖기 위해 떼를 쓰다가 결국 손에 쥐고 조몰락거리며 논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것에 관심이 생기면 금세 잊어버리고 내팽겨 친다. 어린아이들은 그러면서 배우고 분별하며 성장한다. 하나 성인(成人)과 어린아이는 다르다. 성인에게는 스스로 선택한 그 행동에 대해서 어떠한 형태로든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사의 성숙하고 아름다운 관계는 강요한다고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대상과의 관계는 이해와 관계의 주체를 어디에 어떻게 두고 있냐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달라진다. 어항 속 물고기나 동물원 우리에 갇혀 있는 색다른 동물을 보는 시각에, 인간의 관점을 조금만 철학적으로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이런 질문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갇혀 있는 것은 과연 사람인가? 동물인가? 물고기인가? 관찰하는 것이 사람인가? 동물인가? 물고기인가? 내 시각에서 벗어나 한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사람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둘러보면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자연스러움을 추구할수록 애써 안 그런 척 평온을 유지하며 태연한 척할수록, 내 속에서 불현듯 일어나는 뜬금없는 불편한 이 느낌을 이해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생각해 보면, 버려지고 내팽개쳐지는 것들이 어디 대접뿐인가? 온갖 것들이 다 내팽개쳐지거나 버려진다. 심지어 생명도 버려진다. 주변에 버려진 유기견과 길고양이들이 쉽게 눈에 밟힌다. 모든 버려진 것들의 과거의 흔적엔 호기심, 관심, 연민, 동정, 소유욕, 욕구 충족, 배설, 애착... 기타 등등 그것을 몽땅 퉁쳐서 사랑이라고 부르는 온갖 명분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이빨 빠진 대접에 겹쳐서 더 이상 재충전이 불가능하게 방전된 휴대폰 배터리를 떠 올려 본다. 용도 폐기된 배터리 때문에 기능이 멀쩡한 휴대폰이 더 이상 쓸모를 잃어버려 방치되거나, 기계 통째로 버려지는 것은 분명 모순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거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분명한 현실이다. 연유야 어찌 되었건, 또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간에 방치되거나 버려진다는 것은 참 씁쓸한 일이다. 거기에 깃들어 있는 첫 마음을 기억할 수 있다면 더욱 그러할 게다.
어제는 "연줄이 끊어진 연, 연줄을 잡고 있는 손"을 떠올렸다. 줄이 끊겨 하늘 높이 제멋대로 자유롭게 나르는 연은 홀가분해야 하는데, 줄을 잡고 있던 손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뜬금없이 더 무거워진 연의 무게, 그 무게 아닌 무게로 인하여 언젠가는 추락하고야 말 연을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창문을 열다가 문득 의문이 생긴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게 아닌 무게가 내게 더해진 것들을 햇볕 아래 꺼내어 그 무게를 재면 과연 얼마나 될까?' 괜한 잡생각이 햇볕을 따라 슬며시 고개를 드는 아침이다.(2015.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