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정문일침

모국어

by 파르헤시아

원음을 그대로 표기하는 것이 그 말에 대한 오해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도 위험하지만, 모든 학술용어를 이미 세계 공용어가 된 영어로 통일함으로써 범세계적 학문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보다 더 위험하다. 이런 생각이 실현된다면 우리들 자신이 모든 지적 활동으로부터 소외된다. 간단히 말하자. 인간의 의식 밑바닥으로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는 언어는 그 인간의 모국어다. 외국어는 컴퓨터 언어와 같다. 번역 과정을 거칠 때의 논리적 정확성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낭비를 용납하지 않는 그 경제적 측면에서도 그렇다. 지식과 의식의 깊이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낭비에 해당하며, 그 낭비에 의해서만 지식은 인간을 발전시킨다. 외국어로는 아는 것만 말할 수 있지만, 모국어로는 알지 못하는 것도 말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말은 도구적 기호에 그치지 않는다.

-황현산, '학술용어의 운명', 황현산 에세이집『사소한 부탁』(난다 /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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