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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Feb 17. 2019

'역사의식'이란 무엇인가?

『역사 책을 짓는 법은 요컨대 진실을 기록함에 있을 뿐이다. 진실을 기록했다면 사람의 선악, 사건의 시비, 세상의 치란을 살펴서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검은색과 흰색이 바뀌고 붉은색과 보라 색이 섞일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무엇을 통해 당시의 진면목을 징험하겠는가?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었는데 글로 보면 역사 책이지만 뜻으로 보면 포폄의 취지를 깃들인 것이다. 진실을 기록하는 가운데 천하의 일을 행하였으니 참으로 노(魯) 나라 역사 책에 진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 불과 진실을 기록함으로써 필삭을 행할 뿐이지 진실을 기록하는 이외에 달리 표준과 준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용한 글은 조선시대의 성균관 유생이었던 윤기(尹愭 1741~1826)의 「정상한화(井上閒話)」, 『무명자집(無名子集)』에 나오는 글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인 노관범 선생의 번역 글이다.

역사의식, 늘 하는 말이지만, 정작 스스로 '역사의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문할 때, 말을 하는 나 자신도 마땅히 뚜렷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철학이란 것을 들여다봐도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말만 가득하다. 내로라하는 똑똑한 사람들 또한 역사의식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막상 실제 내용은 그냥 뭉텅 그려서 이야기할 뿐이다. 심지어 아베스럽고 조중동스러운 도척의 부류들과 기지촌 지식인들 그리고 향원 부류들까지도 역사의식을 들먹인다. 그래서 옛사람의 글을 뒤졌다. 다행히 조선의 학자, 무명자 윤기 선생의 글에서 역사의식을 나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역사의식에 대해서 사전을 찾아보면, "어떠한 사회 현상을 역사적 관점이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악하고, 그 변화 과정에 주체적으로 관계를 가지려는 의식."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여기에 또 생각해야만 할 단어인 주체적(主體的)이란 단어가 나온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자주적이고 자유로운 성질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라고 정의되어있다. 이렇듯 사전적 의미를 바탕으로 나름 정리하면, 역사의식이란, "역사가 나와는 무관한 것이 아닌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필연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역사적 존재로써 생각하고 자각하고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존재든 그 존재의 기록이든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란 말의 바탕에는 역사적 존재라는 의미를 마땅히 포함한다. 과거의 문화· 사회· 전통· 관습· 혈연 등의 유산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이 그러한 과거 유산의 주체요, 생산자라는 점에서 인간은 분명 사회적 존재이며 동시에 역사적 존재이다. 따라서 현재의 시시비비를 비교 검증하여 알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기준은 과거의 진실과 경험에 있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공동체든지 사회·문화·전통에서 완전히 독립된 공동체는 없다. 개인과 분리된 공동체 혹은 집단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집단과 공동체의 건강지표는 구성하는 전체가 찢어진 낱개로 존재하는 개인이냐 아니면 개개의 특성이 그대로 보존된 전체인가에 달려있다. 개개의 특성이 자유롭게 보장된 건강한 집단 혹은 공동체에는 당연히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는 자율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타 집단 상호 간에서도 서로 조화를 이룰 수밖에 없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역사적 존재, 사회적 존재로서 책임을 자각하고 인식하는, 건강한 자율적 개인이 있다. 역사의식의 중요성은 여기에도 있다.

그런데 역사가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쉼 없이 변화하고 흐른다는 사실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움직이는 흐름과 변화의 궤적이 곧 역사라 할 수 있다. 과거 없는 현재는 없고, 현재 없는 과거는 존재할 수 없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문명과 사회는, 필연코 사멸한다는 사실은 역사의 궤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교훈이다. 특히 실패가 개선되지 않는 과거의 경험은 역사의 궤적에서 끝없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현재는 과거와 현재의 끝없는 대화'이며, 동시에 과거와 현재는 미래의 거울이며 동시에 가능성이라는 말이 모두 성립된다.  

이처럼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올바르게 파악하는 이성적 능력은, 인간 실존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현재는 비록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음에도 수많은 변수의 개입 가능성 때문에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그 확실성마저 담보하기가 어렵다. 현재가 그러할진대 미래는 상상으로 그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현재의 시시비비를 가늠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이나 원칙이 없다면 확실한 미래는 더욱더 보장할 수 없다.


공자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가 묵자는, "인간이 객관적 사물·상황·사건 등과 관련된 지식· 통찰· 이론 등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준과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가장 먼저 과거 역사의 경험과 진실된 기록 속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라고 통찰하였다. 진실로 검증된 역사는 인간사·세상사의 시시비비 및 성공과 실패, 진실과 거짓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과 원칙이 된다는 말이다.


윤기 선생은, "역사 책을 짓는 법은 요컨대 진실을 기록함에  있을 뿐이다. 진실을 기록했다면, 사람의 선악, 사건의 시비, 세상의 치란을 살펴서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검은색과 흰색이  바뀌고 붉은색과 보라 색이 섞일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무엇을 통해 당시의 진면목을 징험하겠는가? "라고 통찰했다. 괴테는 "역사의 의무는 진실과 허위, 확실과 불확실, 의문과 부정(否定 잘못임을 단정함)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진실 그대로의 가감이 없는 과거의 역사는 현실의 시시비비와 선악의 구별, 그리고 성공과 실패를 파악하고 검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준과 원칙이 된다.


이때문에 사악한 독재자들이나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권력 집단들은, 자신들의 사악함과 부정함을 덮거나 합리화하는 정당성의 역사적 사실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려고 기를 쓰는 것이다.  삶의 주체로서 또 역사적 존재로서 과거를 잊거나 무시하거나 왜곡한다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는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배움에는 정도가 없고, 또한 끝이 없다. 모르면 당하게 마련이다. 모르면 물어서라도 배워야 한다.


다시 '역사의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좀 더 구체적으로 '역사의식이 무엇인가?를 나름 다시 정리하면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스스로 '역사적·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존재'라는 자기 인식을 가지는 것이 바로 역사의식이다. 둘째, 현재  삶의 문제를 역사를 살펴서 옳고 그름을 검증하고 분간할 수 있는 이성적 사고능력이 곧 역사의식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을 하거나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릴 때 상황·현상·사건·사물 등등 그 대상이 거쳐 온 과거의 역사를 파악하고, 사람의 선악, 사건의 시비, 세상의 치란을 살펴서, 그것이 가지는 의미와 교훈을 생각해볼 수 있는 사고 능력이 곧 역사의식이다.  

자신과 현재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 즉 우리가(나는) 어디에서 와서,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한 자기비판과 성찰에서 역사의식은 출발한다.  이렇듯 역사의식은 과거를 돌이켜 교훈을 얻고 현재를 돌아보아 반성하며 그래서 잘못된 현재를 바로잡아 좀 더 나은 미래를 희망하고 지향하도록 우리를 이끌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하는 역사의식의 개념에 대한  이해의 한계다. 역사의식의 개념에 대한 더 이상의 축약 혹은 확대는 오직 생각하는 깨인 사람들의 또 다른 몫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역사 왜곡과 조작과 호도가 난무하는, 오직 승자 독선의 각박한 사회 현실에서, 올바른 역사의식은 더욱 절실하다 하겠다. 역사왜곡은 민족의 운명을 건 범죄다. 이를 방치하고 외면하는 것 또한 그 범죄에 동참하는 것이다. 분명 옳지 않은 것 잘못된 것을 모르는 척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힘없는 우리네 평범한 민초들이 비뚤어진 현실과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실종된 역사의식의 회복이다. 분명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질 때, 비로소 역사의 책임 있는 주체로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빗방울 하나하나가 모여 큰 빗줄기를 만들고, 큰 빗줄기는 큰 강을 이룬다. 그래서 작은 빗방울 하나가 결국에는 인간이 감히 거스릴 수 없는 엄청난 자연의 힘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 답지 못하고 비열하고 사악하며 부패하고 타락한 기득권자들에게 되풀이하여 속고 또 속으며, 계속 무력하게 당하고 사는 현실의 삶이 서럽기 그지없다. 정치인들과 그들의 마름질을 하는 학자·문인들은 노골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사회 현실을 곡학아세하여 대중의 올바른 가치관과 의식과 판단을 혼란스럽게 하고, 언론은 그들이 추종하는 유형무형의 권력의 시녀가 되어 끊임없이 대중을 호도하고 기만한다. 심지어 공권력을 집행하여 사회정의를 수호해야만 하는 사법 집단들마저 전방위적으로 이익 카르텔을 형성하여, 온갖 탈법과 불법과 범죄를 공공연히 축소하거나 묵인한다. 기득권 세력 자체가 법위에 존재하는 무소불위의 범죄 집단화되어 버린 작금의 사회와 정치 현실이 암담하게 느낄 정도로 안타깝다.

비록 비탄스럽고 처절하게 비참하고 부끄럽고 서럽고도 아픈, 불행한 과거 역사일지라도, 우리 옛 선조들, 순국선열들의 눈물과 한과 고통, 피와 땀, 그리고 나라를 위해 정의를 위해 대의(大義)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던진 숭고한 희생정신들이 없었다면, 오늘-지금-여기라는 현재는 없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를 망각한다는 것은, 곧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필연의 결과를 야기한다. 그래서 '역사를 잊은 민족(개인 혹은 공동체)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앞서 간 선각자들은 통찰하였다. 불행한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 현재에도 계속하여 반복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개인이든 조직이든 '역사의식의 결여(혹은 부재)'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이 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을 반복하기 마련이다"(조지 산타야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 자들은 그것을 반복하게 마련이다"(윈스턴 처칠)"  사회 정의· 법 정의의 실종. 왜곡된 역사, 역사의식의 부재. 아무리 먹고사는 일이 바쁘고 절실하다 할지라도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 아니겠는가? (2014. 3.27 / 2019.2.16 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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