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반쯤만 공유된 신뢰할 수 없는 지각의 안갯속에서 살았다. 감각 데이터는 욕망과 믿음의 프리즘을 통과하며 왜곡되어 전달되고, 그에 따라 우리의 기억 또한 왜곡되었다. 우리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보고 기억하며,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설득했다.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한 가차없는 객관성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회전략이었다." -이언 매큐언(소설 'Enduring Love', 1997)
'자신의 믿음 또는 확신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을 때, 잘못된 믿음을 인정하기보다는 현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왜곡한다’, 이를 심리학에서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나 신념, 믿음 등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태도를 바꾸어서라도 이를 해소하고자 하는 경향”이다. 인지부조화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의 선택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태도와 관련된 행위가 외적이고 상황적인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자 스스로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진 경우에만 인지부조화를 경험한다. 둘째, 선택한 행위가 원점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행위를 언제라도 변경할 수 있다면 인지부조화는 발생하지 않는다. 셋째, 선택한 행위의 결과가 예측 가능해야 한다. 즉 자신이 선택한 행위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것을 알거나 예측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를 한 경우에 인지부조화가 발생한다.
이처럼 인지 부조화가 발생하면 부조화를 최소화하기 위해 현실의 실제를 왜곡하여 그 부조화를 해소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이때 '중요성'(importance), '영향력'(influence), '보상'(reward)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자기 합리화의 크기와 정도가 결정된다. 말하자면, 자신의 선택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라 확신하면 할수록, 현실을 왜곡해서라도 자신의 생각이나 태도를 자신의 선택에 맞추고, 부조화를 해소하고자 하는 의지도 더 커진다. 그래서 자신의 기대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자기의 기대·희망·확신에 부합하는 것만 부지런히 찾게 된다. 또 자신의 선택이, 어떤 형태의 외적 권위 등으로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현실을 왜곡해서라도 그 부조화와 해소의 의지도 덩달아 커진다. 또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보다는 부조화 상태에서 얻게 되는 이익, 즉 보상이 더 클 경우에, 다소 양심이 찔리고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그것을 억누르고 현실을 왜곡해서라도 부조화 상태를 그대로 수용한다.
사회 심리학자인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는 인지부조화 이론을 설명하면서 “실제로 인간의 행동은 보상 이론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없다. 인간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위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단히 놀라운 정신적 활동을 한다”라고 통찰하였다. 또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인지부조화의 해소 과정이 곧 행동의 합리화 과정이며, 따라서 어떤 선택에 따라 행동한 이후의 태도는 그 행동과 일치하도록 조정된다."고 통찰하였다. 이러한 경향성을 바탕으로 레온 페스팅거는,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라기보다 합리화하는 동물이다."라고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시지프 신화'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이 부조리하지 않다고 스스로 설득하면서 생(生)을 보내는 동물이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매우 고질적이고 핵심적인 믿음을 가진다. 이 때문에 자기 믿음과는 전혀 다른 현실의 객관적 증거가 사실로 드러나면, 그 새로운 증거를 사실로 인정할 수가 없게 된다. 대신에 그것은 '인지 부조화'라고 불리는 매우 불편한 느낌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래서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왜곡하여 합리화하고, 무시하고, 심지어는 부정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핵심 믿음을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프란츠 파농('검은 얼굴 하얀 가면', 1952)
정리하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행동이 자신의 평소 생각과 태도에 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나는 상황에 마주하게 되면 인지부조화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심리적으로 불편한 감정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는 원인인 행동-태도 사이의 부조화를 해소하고자, 현실을 왜곡해서라도, 생각과 태도를 자신의 선택에 부합하도록 수정한다. 그리고 특히 중요도가 높거나(importance), 파급되는 영향력이 크거나, 보상(reward)이 큰 쪽으로 더 큰 부조화도 받아들이고,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인지부조화 이론은, 인간이 왜, 어떻게 심리적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되는가에 대한 좋은 이해를 제공한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와 혼동하기 쉬운 개념으로, '인지왜곡'(cognitive distortions)이 있다. 인지왜곡은 개인이 지각하고 인지하는 현실, 상황, 사물 등을 왜곡된 신념과, 그릇된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인지적 오류에 해당된다. 즉, 사고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에 왜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빨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세상이 전부 빨갛게 보이는 것과 같다. 인지부조화는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로 그이후에 부조화가 발생하여 왜곡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인지왜곡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인지왜곡은 역기능적인 사고체계를 바탕으로 아예, 정보처리 과정에서 자동적으로 왜곡이 이루어지기때문이다. '역기능'이란 본래 의도한 것과 반대로 작용하는 기능, 또는 비정상의 상태로 기능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컴퓨터에 'A'라는 데이터를 넣으면 반드시 'B'라는 결과물이 나오도록 프로그래밍을 했는데, 의도치않은 엉뚱한 결과물이 계속 나오는 것, 이게 바로 역기능이다. 인지치료의 창시자인 아론 벡(Aaron Beck)은, "역기능적인 사고체계로 인하여 정보처리과정에서 자동적으로 인지왜곡이 발생한다. 그 결과로 현실 부적응의 상태로 이끌어 우울증, 정서장애, 성격장애를 유발한다."고 통찰했다.
인지부조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조지오웰은 소설 '1984'에서 '이중사고'를 제시한다. 이중사고는 생각으로는 무언가가 모순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면서도 그 모순된 행위를 계속하는 경우다. 여기서 전형적인 인지부조화가 발생하는데, 이중사고는 이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왜곡 혹은 합리화가 아닌, 아예 자신의 모순된 행위에 대한 기억 자체를 끊임없이 말살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인지부조화는 자신의 자발적 선택으로부터 비롯되고, 조지오웰의 이중사고는 거의 자발적 세뇌에 가까운 것으로 외적 압력에 순응하고자 하는, 강력한 심리적 욕동으로부터 기인한다.
"'이중사고'란 낱말은 이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우선 이것은 한 사람이 두 가지 상반된 신념을 동시에 가지며, 그 두 가지 신념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그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불필요해진 사실은 잊어버렸다가 그것이 다시 필요해졌을 때 망각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며, 객관적인 현실을 부정하는 한편으로 언제나 부정해 버린 현실을 고려하는 등의 일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조지오웰( 소설, '1984')
우리 옛 속담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있다. 그 뜻은 범죄로 죗값을 치르게 된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서글픈 자기 고백과 회한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먹고살기 위해서라지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현실적인 삶, 특히 먹고사는 문제는 참 어렵다. 인간은, 의식주라는 본능의 욕구 그리고 이왕이면 좀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와 연관된 사회적 욕구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지부조화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 또한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자기 기만과 이율배반적인 내 삶의 모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 실제하는 나의 민낯은 세상의 객관적 잣대로 보면, 어쩌면 한갓 속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다. 더욱이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또 책임지는 것이다. 내 삶은 그 누구도 나대신 떠맡아 책임져줄 수 있는 삶이 아니다. 개인의 삶은 그 삶의 실질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마땅히 존중받아야만 한다. 여기서 '존중'이란 말의 의미는 '높임', '소중함'의 의미보다는, '감정, 생각, 정서, 선택, 신념, 삶의 이야기 등 그 모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라는 의미에 무게를 더 두고싶다. 또 자기 삶의 방식이 자기 양심에 거리낀다고 해서 그 삶의 태도와 행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여 스스로 기만할지라도 그 또한 개인의 자유다. 따라서 한 개인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잣대로든 판단할 자격이나 권리는 없다. 신경의학자인 올리버 색스의 말을 잠시 빌리면, "생물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우리는 서로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로서 우리 모두는 각각 고유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기 양심을 억누르고 자기를 합리화하며 자기를 기만하면서도, 자기 기만적인 삶의 방식에 어떤 형태의 권위를 덧칠하고, 논리적 합리성과 상황적 정당성을 부여하여 자기의 상업적·사회적 상품 가치를 높이고자 시도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아울러 비판적 사고능력이 없는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여 자신을 정당화하는 무언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스스로가 기만하는 삶의 방식을 주입하고자 시도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행위는 당연히 그 시시비비가 비판되어야 하고, 또 마땅히 경계해야만 할 일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지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정당화는, 그것이 현실 왜곡이든 자기 기만이든 간에, 자기 양심의 테두리 안에서만 허용 가능하고 또 유효한 자유 의지라는 말이다.
"죄책감은 자신을 고문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개발해냈고, 시간이 가면서 떠오르는 세미한 기억의 구슬들을 하나하나 실에 꿰어 평생 동안 돌리면서 기도해야 할 묵주로 만들어 놓았다." -이언 매큐언(소설 '속죄', 2001)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사람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선인이 악인으로 변신한다거나, 악인이 선인으로 변하는 경우, 그 진위와 진정성을 구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다림의 시간뿐이다. 본색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드러난다. 배신을 해 본 사람이 또 배신한다. 먹고사는 문제 혹은 이해득실의 문제 혹은 더 나아가 절체절명의 절박한 상황과 맞물리게 되면, 사람의 본색은 백일하에 드러나고 그가 본래 추구한 바 목적이 선명해지기 마련이다. 비록 과거가 어떠하든지 간에 어느 순간 극에서 극으로 변한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일 따름이다.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사람에 대한 어설픈 불신과 섣부른 편견에 있지 않다. 분별과 다름의 인정(認定)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성찰과 경계(警戒)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시대의 소음(2016)'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늑대는 양이 느끼는 공포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내가 즐겨 인용하는 문장이다. 현실의 경험으로 대중을 상대로 하는 문인, 학자, 종교인, 강연자, 작가, 지식인 들 중에 그들이 글로 문자로 말로 표명하는 신념· 사상· 담론 등이, 정작 그들이 몸담고 먹고사는 현실의 삶과는 괴리된 이율배반적인 인품(人品)의 사람들을 흔히 접한다. 다시 말해 '사람의 됨됨이' 또는 인성(人性)의 측면에서 그들이 보여 준 이미지, 그들이 내세우는 성공적인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수준 이하 상식 이하의 실체를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은, 비록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더라도, 자기 밥그릇이 달리고 이해득실이 걸린 문제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면, 언제든지 자신의 선택에 맞도록 자신의 생각과 태도와 노선에 수정을 가하고 얼마든지 자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며,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이 앞뒷면 변신이 가능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경험적 사실 또는 경험으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 개인의 삶에 국한된 것으로써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 혹은 편견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 그들의 이미지에 대한 내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 또한 컸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몸소 체험하고 느낀 사실이라는 것 만큼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중국 유학(儒學)의 이단아로 불리우는 양명학자 이탁오(李贄)는 '분서(焚書)'에서 이런 자들을 특정하여 "요리조리 뒤집는 짓이나 반복하여 세상을 속이고 이익을 차지하니 명색은 처사인데, 그 마음은 장사치나 다름이 없고, 입으로는 도덕을 외치지만 뜻은 개구멍을 파는 도둑질에 있다. 명색은 산림처사라지만 마음이 장사치나 진배없으니, 이 얼마나 비천한 꼬락서니인가?"라고 그의 벗에게 한탄하는 편지 글을 썼다. 그는 '속분서(續焚書)'에서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대기에 급급했던 까닭이다." 라고 자신을 적나라하게 성찰한 인물이다.
다른 한 편으로 연상되는 속담이 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라는 속담, 또 '중이 고기맛을 알면 절간에 빈대도 안 남기고, 속인(俗人)도 고기맛을 알면 외양간 널빤지를 핥는다.' 라는 속담이다. '권력은 곧 마약이다'라는 말도 앞의 속담들과 같은 맥락에 있다. 나역시 이러한 속담의 범주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비록 나는 글을 파는 장사치 또는 뒤로 개구멍을 파는 도둑은 아닐지라도, 곧잘 생각과 태도의 부조화때문에 마음에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이처럼 이유 없는 삶, 이야기가 없는 삶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오직 하나의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삶 또한 없다.
"내가 듣건대 '군자는 스스로 병이 되는 것이 셋이 있다 '고 한다. 선을 악으로 알거나 악을 선으로 그릇되게 아는 의견의 병(意見之病). 선인 줄 알면서도 선을 따르지 못하고 악인 줄 알면서 악을 버리지 못하는 지기(志氣)의 병(志氣之病). 선을 알면서 선을 따르지 못하고 그 따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저것은 진실로 선이 아니다.’라고 변명하고, 악이란 것을 알면서도 악을 버리지를 못하고,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이것은 진실로 악이 아니다.’라고 변명하고 고집하여 자기를 합리화하는 심술(心術)의 병(心術之病), 이 세 가지다. 의견의 병은 깨달아 알면 없앨 수 있고, 지기의 병은 의지를 갖고 힘써 노력하면 버릴 수 있으나, 심술의 병은 죽어야 끝날 뿐이다." -김매순( '應客' 응객 /臺山集 대산집)
어쨌든 인지부조화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최소한 이런 점에서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는 본능적 성향 또는 본질의 차원에서 서로 다를 바 없는 존재다. 다만 주관적 인지 혹은 인식의 틀에서 대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생각하고 경험하고 자각하는 사유의 방식만이 서로 다를 뿐이다. 도종환 시인의 말처럼, 그 주관적 인식의 틀에서 나오는 '망심도 내 마음이요 진심도 내 마음이라 단지 한마음의 다른 작용'에 불과하다. 삶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불구하고 선택의 연속이다. 비록 내 삶일지라도 항상 내 생각대로 내 의지대로 흘러가는 것만은 아닌 까닭에, 곧잘 잘못된 선택,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일이 허다하다. 문제는 잘못된 선택을 내린 이후에 있다. 이때 어김없이 인지부조화는 심리적으로 나를 얽매고 마음을 양심을 불편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지부조화의 상태에 직면했을 때,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철학자 칼 포퍼의 「논박과 추측」 서문(1962)에서 바람직한 해법 하나가 찾아진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 비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경험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태도를 가리켜 비판적 합리주의라고 한다. 실수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려면, 가장 먼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내 주관적인 인식 이외에도 얼마든지 다른 시각, 다른 생각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생각하고 보고 알고 이해하고 지각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갖는 일이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영화, '증인')
실수가 없는 완벽한 사람, 흠결이 없는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갓난 아기가 걸음마를 걷기 위해 얼마나 수없이 많은 넘어짐과 엎어짐을 반복하는가? 비록 내가 틀린 선택을 했을지라도, 비록 실수를 했을지라도, 그것이 곧 나의 어리석음, 나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틀린 것임을 깨닫고 실수를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인지부조화의 문제는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 애써 자신을 교묘하게 합리화하고 굳이 자기를 기만할 필요조차 없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비록 실수를 하고 허물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자신을 기만하면서까지 자기합리화를 하고 다른 사람까지 그 기만의 장(場)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고 그 경험으로부터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정신적으로 건강한, 바람직한 사람일 것이다.
미셀푸코의 말로 글을 맺고자 한다. "우리 인생에는 의문이 반드시 필요한 그런 순간들이 있다. 즉 '성찰과 관찰을 계속하기 위해서 자기가 현재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며,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지각할 수도 있다'라는 의문 말이다. 그렇다면 철학, 철학적 행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현재 생각하고 있는 것(사유)을 비판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아닐까?"( 「성의 역사」 제2권 '쾌락의 활용', '서문')(※2019.4.5 쓰고 4.7 정리하고 다시 고쳐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