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유학자인 한단순(邯鄲淳, 132년 ~?)이 지은 해학집인 "소림(笑林)"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 초나라 땅에 가난한 한 서생(書生)이 있었다. 그는 회남자(淮南子)를 읽고 사마귀가 매미를 잡을 때, 나뭇잎에 몸을 숨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나무 밑에서 그러한 나뭇잎을 찾았다. 마침내 그는 사마귀가 나뭇잎 뒤에 숨어서 매미를 잡을 기회를 엿보는 것을 발견했다. 그 나뭇잎을 땄다. 그런데 그만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먼저 떨어져 있던 나뭇잎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그 근처에 있던 나뭇잎을 모두 쓸어 담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나뭇잎을 하나하나 들어 자기 눈을 가리고는 아내에게 "내가 보이는가?"라고 물었다. 아내는 처음에는 물을 때마다 "보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남편이 온종일 똑같은 질문을 하자 나중에는 귀찮아져서 되는 대로 "안 보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내의 말에 자신감이 생긴 서생은 잎사귀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길거리로 나갔다. 그는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심문하는 관리에게 '나뭇잎으로 눈을 가렸기 때문에, 당신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를 심문한 관리는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한바탕 크게 웃으며 죄를 묻지 않고 풀어주었다.
고사성어 일엽장목(一葉障目)의 출전이다. 그 뜻은 '나뭇잎 하나가 눈을 가린다'는 뜻으로,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현상(現狀)에 미혹(迷惑)되어 전반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편견이 어떤 방식으로 강화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일례다.『여씨춘추, 자지 편(呂氏春秋 自知 )』의 고사성어 엄이도종(掩耳盜鐘), 또는 엄이도령(掩耳盜鈴)도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그 뜻은 ‘어리석은 자가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행동’을 이르는 말이다.
나는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고정관념을 싫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름의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고정관념까지 고루 가지고 있다. 내가 의식하는 것도 있고,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내가 그러하니 다른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산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야말로 이율배반이요, 또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자신은 그러하지 않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우습게도 그런 점에서 더 큰 위안을 삼는다. 문제는 의식하는 것들이 아니라, 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것들이다. 이것들이 종종 합리를 가장하여 자동적 사고로 이끈다. 의도는 하지 않았지만, 비합리적이 존재로 몰아가기도 한다. 어쩌면 일종의 '자기도취'요, '자가당착'이라 볼 수도 있다.
심리학자로 특이하게 노벨 경제학상(행태경제학)을 수상한 다니엘 커너만은,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편향적이고, 비합리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밝혀 내었다. '인간이 비이성적이다'는 것은.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인류의 역사가 말해 준다. 단지 그것을 누군가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하지 않았을 뿐이다. 파킨슨(Parkinson, C. N.)이 말하는 '사소함의 역설'(Law of Triviality)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다가, 막상 중요한 것을 곧잘 잃어버리거나 놓쳐버리곤 한다. 이 또한 나만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기도 한다. 이 또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시시비비 논리와는 상관없이 듣기 싫은 말, 거북한 말, 불편한 말을 직접적으로 듣는 것을, 나는 싫어한다. 돌아서서는 곧 반성하고 후회할지라도 말이다. 아이들에게 잘되라고 하는 훈계는, 부모로서 마땅히 할만한 소리다. 그럼에도 듣기 싫어하는 것은 사실이다. 요즘 아이들 표현으로 하자면 '바른 개소리'다. 내 어릴 적에도 그러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 내 마음에 불편하고 거북한 것은 듣기 싫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듣기 싫고, 거북하고, 불편한 글을 곧잘 쓴다. 이 역시 내 속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들이, 토하듯 나오는 소리일 수도 있다. 토한 것은 반드시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이 글 또한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내가 토하는 대부분의 글마저도 여기 저기서 숟가락질, 젓가락질하여 내 의견이라는 양념쳐서, 묵히고 숙성시킨 것이 태반이다. 어째튼 속내를 터는 내 글 공간에서 만큼은, 나는 매우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심지어 편견에 사로잡히고, 이율배반적인, 벌거벗은 인간이다. 이기적이라는 점에서, 남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이해하건, 평가하고 판단하든, 그것은 내 상관 할바가 아니다. 단지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뿐이다. 이것 또한 역설이다.
나는 가끔 내가 생각하고 있는 어떤 신념의 당위성 같은 것들을, 주변의 다른 대상들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뭔가 고상하고, 교양 있고, 현명하고, 완벽하고, 심지어 거룩하게 보이며 뭔가 특별해 보이는 사람은 왠지 거부감이 든다. 일종의 자격지심이나 열등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여겨진다. 추하고, 더럽고, 악하고, 나쁘고, 등 부정적인 것들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다. 완벽한 아름다움과 순수한 고결함마저 보이기에 의심마저 든다.
그러한 사람들의 보이는 전면보다는, 그들이 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는 이면을 읽는 데에 나는 익숙하다. 앞보다는 뒤가 많이 어두울 것 같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애써 순수하고 아름답게 포장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는 일은 불편하고도 거북한 일이다. 아름다운 것은 추운 겨울날, 시골 장터에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의 쭈그러진 검은 손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도 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에서 주인공 윌터는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아... 가끔은, 아름다운 순간이 오면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면 되는 거야."
한편으로, 나와 비슷한 처지나 환경의 보통 사람에게 눈길이 자주 간다. 뭔가 여백이 있는 사람, 상처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 홀로 하는 속앓이가 훤히 보일 정도로 다소 허술한 사람, 나와 비교해도 그리 위화감이 들지 않고 만만해 보이는 사람, 굳이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느낌만으로도 따뜻함이 배어 나오는 사람, 내가 농담을 하고 대놓고 놀려도 그냥 받아 줄 것만 같은 사람, 그래서 비록 허물 많고 허술한 나일지라도, 내가 그에게 뭔가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등이 그렇다. 내가 그만큼 허술하고 허물이 많음을 스스로 잘 아는 까닭이다. 이런 이들을 사람 냄새 운운하며, 나름의 갖은 구실을 붙여 가며, 애써 찾아보기도 한다.이들을 통해 내가 생각하는 것들의 당위성과 유사점을 찾고자 나름 애쓴다. 만일 그렇다고 생각되면, 그가 내는 소리에 귀를 깊숙이 기울이게 된다. 내 입맛에 맞는 듣고 싶은 소리라면 더욱 귀를 기울인다. 때론 여러 소리의 조각들을 통해서, 내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패턴을 읽어내고는 몰래 실망하기도 한다. 남몰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실망들이 바로 내 무의식적 편견을 강화시키는 이기적이고 자동적인 사고의 전형이다. 양태만 달랐을 뿐, 아내에게 확인받는 일엽장목의 사내, 귀를 막고 종을 훔치는 사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내가 생각하고, 원하고,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려고 하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일엽장목', '엄이도종'의 이야기가 내겐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이는 내가 온전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며, 심지어 편향적인 사람이라는 하나의 반증이다. 그럼에도 나는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착각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글 읽기를 중단하지 않고, 마치 토해내듯, 가끔 잡다한 글을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 스스로는 못할지라도, 글은 때론 몽학 선생이 되고, 때론 반면교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때때로 내 의식과 무의식을 건드리고 내 부끄러움을 일깨우기도 한다. 따라서 내게 책과 글은 내 마음의 죽비와 같다. 자기 합리화로 간혹 집나간 양심을 때리는 채찍이기도 하다. 내 비록 합리적인 존재는 못될지라도, 온전한 생각만이라도 제대로 가지고 싶다. 책만 보는 바보 형암 이덕무 선생의 심사가 예사롭지 않게, 내 마음에도 고스란히 전해 온다.
"슬픔이 닥쳤을 때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하여, 오직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만 싶고 한 치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없어진다. 다행히 내가 두 눈알을 지녀 자못 글자를 알므로, 손에 한 권의 책을 들고 마음을 자위(自慰)하며 보노라면, 조금 뒤엔 좌절되던 마음이 조금 안정된다. 만일 내가 눈이 비록 오색(五色)을 볼 수 있지만 서책에 당해선 깜깜한 밤 같았다면, 장차 어떻게 마음을 쓰게 되었을는지?.."(이덕무, 청장관전서/이목 구심서)
또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갈관자(鶡冠子)의 〈천칙 편(天則篇)〉에 이런 글이 나온다.
"무릇 귀는 듣는 것을 주관하고 눈은 보는 것을 주관한다. 그러나 나뭇잎 하나가 눈을 가리면 태산이 보이지 않고, 두 알의 콩이 귀를 막으면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일엽폐목(一葉蔽目) 불견태산(不見太山). 이는 '사소하고 단편적인 현상에 가려 사물의 전모나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다. 최근의 인지심리학자들이나 뇌신경학자들에 의하면, 눈도 귀도 기억마저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판명된 세상이다. 속이는 것이 바깥뿐만 아니다. 내 속에도 존재한다는 의미다. 다만 의식하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손바닥으로, 나뭇잎 하나로 세상을 가릴 수는 없다. 하지만 눈 하나는 가릴 수 있다. 단지 눈 하나 가리는 그것만으로도, 생각도, 사실도 진실도, 심지어 양심마저도 가려질 수 있으니, 참으로 경계로 삼을만하다.
조금 비약하자면, 일엽장목과 엄이도종의 고사가 의식적인 행위로 드러난 어리석음을 가리킨다면, 일엽 폐목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어리석음에 비견할 수 있겠다. 정작 두려운 것은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있다. 만약 이 양쪽 모두를 빗대어 거울로 비춰볼 수 있다면,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질 것만 같다.
어떤 글에 보니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족하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나를 알아주는 그런 단 한 사람이 바로 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어차피 서로 지지고 볶으며 자기애를 넘어서지 못할 바엔,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 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게 푸념이든 착각이든 여전히 나는 나일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아주 가끔 물에 적셔진 화장지처럼 풀어져 마음이 흔들릴 때 "일엽폐목 불견태산(一葉蔽目, 不見太山)"을 떠 올릴 수 있는 생각의 끈 하나, 침침해도 아직은 글을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그루터기로 겨우 남은 자존심 하나 정도는 있다는 사실이다. 때론 알량한 내 편견마저도 고맙게 여겨질 때도 있다. 이는 나름의 발버둥이다. 우연한 기회로 부끄러운 속내를 이렇게라도 털어 본다.
"남자는 어린애 아니면 개, 둘 중 하나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내게 적용해 보면, 어쩌면 분명 개는 아닐 것 같다. 나는 껍데기만 늙수구레한 '어린애'에 가까울 것 같다는 유치한 생각을 잠시 해 본다.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욕망보다 예술에 더 사악한 효과를 미치는 것도 없다." 필립 로스의 소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에 나오는 글이다.(201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