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는 실제로 일어난 사실들을 이야기하고 시인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며 더 심각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더 많이 이야기하는데 반해 역사는 특수한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시학)
옛날 우리 동네 이발소에는, 의자 앞 거울 위에, 아름다운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머리를 깎으며 그림을 볼 때마다 "어쩜 저리도 잘 그렸을까?" 내심으로 감탄하곤 했다. 나는 유명 대가들의 난해한 추상화에 왜 너도나도 감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 액수의 가격이 왜 매겨지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난해한 추상적 묘사보다는, 비록 축약하고 은유로 꼬우고 비틀어가며 행간의 여백을 남길지라도, 맥락과 개연성이 치밀하게 구성된 사실적 묘사에 내 시선과 마음은 더 끌린다.
세상 기준으로 말하자면 나는, 예술·문화적 감성과 교양 수준이 미천(微賤)한 무식한 사람이다. 적어도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굳이 소크라테스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그 몰이해의 원인이 바로 내 무식의 소치 혹은 내 무지의 소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지는 않는다. 내 글 취향, 독서 취향도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시의 경우, 시어와 맥락이 이해가 안 되는 난해한 시는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만약 시인이 쓴 글과 산문이 있다면, 그것을 미루어 그 시인이 쓰는 시의 질적 수준과 진정성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는 있다.
나는 시를 남달리 가까이하며 즐겨 읽는 소위 교양스런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애써 시를 찾아서 읽고 싶을 정도로 문득 감상에 젖는 날이 더러 있다. 이렇듯 나는 더러 시에 끌리고, 또 간혹 시를 찾아가며 읽는 졸(拙)한 독자(讀者)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시들은 아둔한 나로선 난해하기 그지없다. 적어도 시를 쓴 시인 자신은 스스로 느끼는 무언가를 혹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문학적 수사와 기교를 총동원하여 시에 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감히 생각하기엔, 아마도 그 무언가는 시인 자신도 장담하거나 확신할 수 없는 그 무엇이지 않을까? 내 둔한 머리로는 아무리 궁리를 해도 시를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렇듯 애먼 시인 탓을 한다.
흔히들 잘 안다고 하는 것일지라도 어쩌면 실제로는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매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해하거나 알게 된 것이라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크다. 비록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여 아는 것일지라도, 자신에게만 국한된 자신만의 경험이요, 느낌 혹은 의견일 수도 있다. 어쨌든 서점의 서가에 꽂혀 있는 수많은 시집 가운데서 내 마음을 건드리고 내 감성을 자극하는 시들은 한 권의 시집에서 겨우 한 둘 찾을까 말까 한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좋은 시란, 은근히 내 마음을 건드리는 시다. 이러한 시들은 한결같이 정서적으로 깊은 공감이 간다. 공감이 가는 이유는, 비록 어렴풋할지라도 적어도 내가 경험한 만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난해한 시는 공감이나 이해하려 하지 말고 시어의 리듬이나 운율을 즐겨라"라고 말한다. 난해시만큼이나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아리송한 말이다. 싫어하는 것을 굳이 찾아서 즐길 이유는 전혀 없다. 더욱이 모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아는 체하고, 이해하는 척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심지어 즐기는 척 하기란 알량한 내 자존심도 시간도 정서적 여유도 도무지 허락하지 않는다.
하여튼 시를 뒤지다 보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집들 가운데서, 내 마음을 툭 건드리거나 쿡 찌르는 시를 드물게 한두 편 만난다. 그럴지라도 마음을 다잡고 여러 번 거듭 읽어야 비로소 함축과 은유와 여백과 행간의 의미가 희미하게나마 읽힌다. 그제서야 시인의 마음이 비로소 어렴풋하게나마 이해되기 시작한다. 비록 제 눈에 안경이라 할지라도, 내게 그런 시는 더는 단순한 관상(觀賞)용이 아니다. 시인의 입을 빌어 나온, 내 입으로 표현조차 할 수 없었던, 내 이야기다. 차마 꺼내지 못한 내 속내다. 이런 시는 굳이 애써 암송하지 않더라도, 내마음에 절로 아로새겨지기 때문에, 아둔한 내 머릿속에서 쉽게 잊히지 않는다. 참으로 대단하고 고마운 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다. 자신의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E.H 카(역사란 무엇인가?)
위에 인용한 E.H 카의 말처럼, 역사기록의 사실 혹은 진실성 여부는 역사를 자신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기록한 역사가의 실제 삶을 그 뿌리로 한다. 글도 시도 음악도 그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내 마음을 건드리는 좋은 시를 쓴 사람의 삶의 궤적에 절로 관심이 간다. 비록 한 두 편의 시뿐일지라도, 내 마음을 건드리는 그런 시를 쓰는 사람들을 나는 진정 존경한다. 추후 그런 사람의 시집이 출간되면 어김없이 그들의 시집을 다시 찾는다. 내 마음을 다시 건드려 때론 나를 다둑이고, 때론 울리며, 때론 감탄케 하고, 때론 나를 각성케 하고, 때론 나를 부끄럽게 만들며, 때론 바싹 마른나무둥치 같은 내 감성을 요동치게 하는, 그러한 시 한 편을 만나기 위해서, 그러한 책 한 권을 만나기 위해서,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처럼 나는 때때로 책방을 도서관을 기웃거린다.(2019.3.19 쓴 것을 2020.1.27 다시 고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