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게 못 되는구나. 예전에 나는 나의 머리를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너희들은 알아두거라,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인용한 글은, 공자가 제자 안회를 오해한 일때문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글이다. 공자가어가 출전이다. 어렵다. 나는 의외로 잘 속는 편이다. 다만 글이나 책을 통해서는 웬간해선 잘 속지 않는다. 워낙 머리가 둔하고 맹한지라, 감성적이든 문학적이든 논리적이든 간에, 보기엔 분명 훌륭하고 좋은 말 혹은 대단한 글 같은데도 불구하고 선듯 이해가 잘 안되거나 공감이 힘들면, 반드시 다른 자료들을 뒤져서 비교하고, 가능한 한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지 살피고, 따져 가면서 읽는 습관이 꽤 오랜 세월 익숙하게 몸에 배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곧잘 속는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그렇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심으로 위장된 마음에 만큼은 잘 속는다. 다른 분야에선 비록 맹탕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일과 거기에 관련된 학문에 꽤 오래도록 가까이 하고 있음에도 그렇다. 말하자면, 내가 스스로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거나, 진심으로 기대하는 분야에서 의외로 잘 속아 넘어가는 듯하다.
게다가 내가 스스로 나를 품평하기를 '좋은 사람' 이라고 확신하며 자기 기만을 하는 지점도 그렇다. 그것은 나를 포함하여 아직도 포기못하는, 사람에 대한 어떤 막연한 희망과 그에 따르는 신뢰때문인 듯하다. 혜강 최한기 선생은 속이는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최한기 선생의 통찰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뿐이다.
"사람을 속이는 자는 모름지기 속을 만한 사람을 골라서, 그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끌어서 그 틈을 엿보아 속일 기회를 찾는다. 또 말씨와 얼굴을 좋게 하여 이르거나 아니면 주변 사람을 끌어서 속임의 도우미로 활용한다. 이 짓을 곧이곧대로 믿고 속는 자는 말할 필요가 없다. 어쩌다가 속아 넘어가는 것은 족히 수치스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속고도 속은 줄을 깨닫지 못하는, 이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다. 한 번 속고 두 번 속고 평생토록 그 사람에게 속는 자를 어떻게 한정(限定)하리오마는, 젊은 적부터 탐관오리가 되어서 남을 속이고 자기를 기만하며, 늙어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부귀를 누리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 줄 알지 못하고, 또 그것을 전하는 자는 속임을 당하는 줄 알지 못하며, 그것을 받는 자도 또한 속는 줄 알지 못하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오직 어긋난 글과 그릇된 학문을 가까이하여 배우고 익힌 결과다." (최한기, '기측체의').
여담으로 나름 분명하게 잘 알고, 또 확신한다고 생각하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즉 언어로 표현된 개인의 말, 글, 신념, 이념, 신앙, 철학, 저술, 작품, 주장 등등이 비록 아무리 훌륭하다할지라도,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인격 혹은 우리가 기대하는 도덕적· 인간적 성품과는 전혀 무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문득 궁금한 것은, 속임의 수법이 세상에 다 드러나고, 속인다는 것을 온 세상 사람들 모두가 뻔히 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어쩜 그토록 당당할 수 있는가? 신기할 따름이다. 마치 쇠북같은, 그 강철같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은근 부러워진다. 거짓과 허위와 왜곡이 난무하는 언론 기사와 페북의 다양한 글들을 훑어보다가 나오는 대로, 몇자 끄적거려 보았다. (202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