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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허튼소리

오해

by 파르헤시아

오다가다 '이문회우(以文會友), 이우보인(以友輔仁)' 이라는 글을 간혹 본다.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부족한 인(仁)을 서로 보충한다.” 대충 이런 의미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한 말이다. 나 또한 개인적으로 이 글귀를 좋아한다. 증자는 '거짓말도 여러 사람이 똑같이 계속 반복하면 진실로 믿게 된다'라는 증삼살인(曾參殺人) 고사의 주인공, 증삼(曾參)이다. 증삼은, 공자 이후 유학의 계보를 잇는 핵심 인물로 '효경'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생각난 김에 '이문회우(以文會友), 이우보인(以友輔仁)', 이 구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며 되뇌어 본다. 문득 내가 좋다고 여기는 생각과 내 삶의 현실에 미세한 괴리가 있음을 인식한다. 최근에 읽은 장자의 글 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세속의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좋거나 맞는 것(可)을 '옳다'(可)라고 하고, 나에게 맞지 않거나 싫은 것(不可)을 '옳지 않다'(不可)라고 고집한다."


오래전 읽은 법정 스님의 수필을 필사한 메모장엔 이런 글도 보인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언외(言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는 법.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


흔히 '소통이 없다'라는 말을 한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건대 이 말은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없다'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하는 듯하다. '소통(疏通) '의 사전적 뜻은, "①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②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다. 비슷한 말로는 '왕래', '교류', '교통' 이 있다. 따라서 소통의 사전적 의미를 안다면, '대화의 부재'란 의미의 '소통이 없다'라는 표현은 부적절한 표현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대화가 없는 상태' 즉 '대화의 부재' 와 '뜻이 서로 통하지 않아 서로 간에 오해가 있는 상태' 즉 '의사소통이 안 되는 상태'는 전혀 다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기대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소통의 희망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서로 간에 오해가 있는 상태, 즉 서로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없으면, 인간관계에서 소통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다. 서로 소통이 안 되는 것에 대한 책임은 양쪽 모두에게 있다. 소통은 대화의 주도권의 여부와 상관없이 일 방향이 아닌 쌍방향이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베네딕트파 수도사이자 문인인 ‘Bernard of Cluny’의 라틴어 시, '세상에 대한 경멸(De Contemptu Mundi)'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고대 로마의 이름은 아직도 존재한다. 다만 빈 껍데기만 남아 있는 이름으로".


증자의 글을 차운하여 그 괴리의 감정을 나름의 글로 다시 써본다. '이문회우(文會友), 이우보인(友保人)'. 한자가 아닌 한글 음역으로 쓴 문장은, 겉으로 보기에 비슷하다고 해서, 자세히 살펴 보지 않으면 착각하거나 오해하기 쉽다. "비슷한 것은 진짜가 아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통찰이다. 소인(小人)은 멀리 있지 않다. 나는, 아주 가끔 내 그림자에 내가 놀랄 때가 있다. (2020.5.14 이른 아침에 쓰고, 밤에 정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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