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인 원리나 도덕적인 양심의 명령 그리고 자연의 법칙에 대해 회의적인 여성은, 보편적인 인식 감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그저 잡다하고 복잡한 것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때문에 과학적인 설명보다는 이웃 여자의 험담 쪽을 쉽사리 믿게 된다. 책을 소중히 여기기는 한다. 그러나 쓰인 글 사이로 시선이 갈 뿐, 내용을 파악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와는 달리 쇼핑 행렬이나 사교장에서 낯선 사람이 말한 일화는 쉽사리 의심할 수 없는 권위로 수용한다.
자신의 영역 안에서는 모든 것이 마술이고, 자신의 영역 밖에서는 모든 것이 미스터리다. 진실과 허위의 여부를 판단하고, 분별하고, 확신할 수 있는 기준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직접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확신을 갖는다. 자신의 경험도 좋고, 누군가가 반복하여 강조한다면 남의 경험도 무방하다. 가정(family)이라는 우물 안에 자신이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의 다른 여성들과 활발하게 대립할 것이 마땅히 없다. 따라서 자연히 자기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남과 다른 특별한 경우처럼 생각한다.
또 언제나 남성의 운명이 자기에게 유리한 예외의 경우를 만들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이론보다 자기 마음속에서 생기는 직관이나 영감을 더 믿는다. 그리고 그것들이 신이나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신비로운 영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믿기 쉽다. 어떤 불행이나 사고에 대해서는 태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또는 이와 반대로, '나만은 예외가 될 거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위의 글은 시몬느 보부아르의 저서, '제2의 성(性)'에 나오는 글이다. 짧은 구절만을 인용하려니, 아둔한 머리에 논의가 자칫 눈을 감고 코끼리를 더듬는 맹인모상(盲人摸象)으로 치우칠 것 같은 우려 때문에, 어쩔 수없이 한 묶음이 되는 긴 글 전체를 인용했다. 위의 인용 글을 자세히 읽지 않고서는 이후 전개하는 나의 논의는 무의미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어쨌든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표현된 텍스트를 읽을 때, 내용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맥락을 살피는 일은 필수적인 과정이다. 어떤 이의 주장, 이론, 논설, 특히 문학, 인문, 철학서를 대할 경우엔 더욱 그렇다. 예를 들면, 글쓴이의 배경, 성향, 삶의 실제 행적, 함께 어울리거나 함께한 사람들, 영향받은 철학,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글쓴이가 살았던 시대의 상황 등등이 맥락에 해당한다.
'한 사람을 제대로 아는 일은 참 어렵다'라고 한다. 자발적으로 진솔하고 허심탄회하게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더욱 그렇다. 하물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이해되지 않는 게 많은데, 남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겉으로 표현된 것들의 맥락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텍스트로 표현된 글의 내용이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썼느냐가 관건이라는 말이 되겠다. 물론 당연히 나도 예외는 될 수 없다.
인용한 보우바르의 글을 읽으면서 그녀의 사상적 배경과 당시 일반 여성들이 처한 사회적 지위를 맥락으로써 참조할 수 있다면, 보우바르의 통찰이 당시로선 획기적이라는 것을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대가 달라지고 사회 상황 또한 달라진 만큼, 그때는 맞을 수도 있고 지금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또 그때와 달리 지금은 엄연히 다른 경우도 숱하게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도 그렇다.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 인간의 심리다. 동서양의 인문 고전이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인류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보편성(普遍性)이란 '모든 것에 두루 통하거나 적용되는 성질'을 뜻한다. 인간의 성향은 남녀 구분이 없다. 위의 인용한 글의 일부는 주어인 여성을 남성으로 바꿔 읽어도, 그 보편성에서 지금도 여전히 그 의미는 통한다. '나', '너' 혹은 '우리'로 대체해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이해관계(利害關係)와 감정의 호불호 (好不好)에 따라 쉽게 뜨거웠다가 쉽게 차가워지는 세태(世態)를 가리켜, '염량세태'(炎涼世態)라고 한다. 염량세태에선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며 앞뒤가 다르며, 겉과 속이 다르고, 자기 입맛에 따라 부화뇌동하는 일은 일상다반사다. 묵자는 사람들이 도리에서 벗어나 그릇된 방향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크게 슬퍼했다. 이를 '묵자비염'(墨子悲染) 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선 주류의 기성 언론이 우리 사회를 염량세태와 묵자비염의 지경으로 이끄는 데에, 대단히 큰 몫을 차지한다. 심지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마땅한 종교마저도 그 본질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로 묵자비염의 처지에 빠져 있다. 어쨌든 깨인 대중은 주저 없이, 이들 언론을 가리켜 부패한 쓰레기 같고, 구더기같이 더러운 적폐 집단으로 간주하는 데에 동의한다. 게다가 파렴치하고 사악하기까지 하며, 반인륜· 반사회· 반국가· 친일· 매국 행위를 예사로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못지않은 악성의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다름없다. 코로나19는 온 국민이 정부와 한마음으로 합력하고 연대하는 한 반드시 극복될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언론은 반드시 개혁되어야만 한다.
깨인 대중들이, 공익의 사명감이 뚜렷한 극소수의 언론 제외하고, 진보·보수 언론 가릴 것 없이 깡그리 불신하고 혐오하는 데엔 그럴만한 사실적 근거와 이유가 넘쳐날 정도로 많다. 맹자 진심하에 이런 글이 나온다. "공자가 말씀하시길, 나는 사이비를 미워하는데, 가라지를 싫어하는 것은 벼싹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처세에 능한 자를 싫어하는 것은 의(義)를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말 잘하는 자를 싫어하는 것은 신(信)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정(鄭) 나라 음악을 싫어하는 것은 정악(正樂)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자주색(間色)을 싫어하는 것은 붉은색(正色)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덕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다.’ 하셨다."
현재 우리 사회에 두 종류의 악성 감염병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 생명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의도적으로 상황과 진실을 왜곡함으로써 보통 사람들의 올바른 생각과 가치와 판단을 심각하게 어지럽히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악성의 언론 바이러스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칫 방심하고 소홀히 하다간 그 누구라도 치명적인 감염을 피할 수 없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더군다나 자발적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심각하게 감염시키는 감염의 매개체 혹은 수단과 도구로 이용된다면, 그것은 정말 심각하고도 처참한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삶에서 사고와 재앙과 불행은 전혀 예기치 않은 데서 덮친다. 한치 바로 앞의 삶도 우리는 섣불리 장담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다만 잊고 살 뿐이고, 단지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행여 당신이 눈으로 직접 목격하거나 귀로 전해 듣는 뜻밖의 사고(事故), 재앙((災殃), 불행들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또는 이와 반대로, '나만은 예외가 될 거야' "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심각한 착각 혹은 위험한 환상에 불과하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고백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이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혜강 최한기 선생은 '기측체의'에서, "어쩌다가 속아 넘어가는 것은 족히 수치스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속고도 속은 줄을 깨닫지 못하는, 이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다."라고 말한다. 시대를 앞서간 지성인, 보부아르의 통찰이 남의 일만 같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시에 이는 각자가 비판적으로 사유하며 늘 깨어있어야만 할 분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202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