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언론에 있어, 양편이 다 그르다는 것은 나무라는 데 가깝다. 양편을 다 옳다는 것은 아첨에 가깝다. 그러나 만약 시비의 올바름을 얻지 못할 경우, 나는 아첨보다는 차라리 나무람을 쫓겠다. 그러나 어지러운 나라에 살면서 사물을 대응함에 있어서는 추기(樞機, 언행)를 조심하지 않으면 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묵이 귀한 것이 된다." -이익('성호사설)
추기(樞機)란, '사물의 중요한 부분'(핵심 되는 부분, 중추기관)이란 뜻이다. 로마 가톨릭 고위 직책인 'Cardinal'을 한자어로 추기경(樞機卿)으로 번역한 것은, 문자적 의미 그대로 교황 다음으로 중요한 가톨릭 교회의 핵심 직책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위의 문장에서 추기(樞機)의 의미는 언행(言行)을 가리킨다.
추기(樞機)의 출전은 주역 계사편이다. "말(言)은 몸에서 나와 뭇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행동(行)은 가까운 곳에서 발동하여 멀리에서도 보인다. 그러므로 언행(言行)이란 군자의 가장 중요한 바탕(樞機)이다. 추기(樞機)의 발동, 곧 언행(言行)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일신의 영광과 치욕이 결정된다(言出乎身, 加乎民, 行發乎邇 見乎遠, 言行, 君子之樞機 樞機之發, 榮辱之主也)"(주역 계사 상 8). 다시 말해 말과 행동이라는 것은 사람의 영광과 치욕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영역이기 때문에, 그 행함에 신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성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몸을 제어하는 것이라(야고보 3장)", 그래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베드로전서 3장)"고 가르친다.
언행은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사람의 인격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하나의 샘물에서 쓴 물과 단물이 동시에 흘러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세치 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한 마디 말로 인하여 마음속에 오래 맺힌 한(恨)이 해소되기도 하고, 미움과 원망이 눈녹듯 사라지기도 하며, 해묵은 오해가 풀리고, 마음의 고통과 상처가 치유되기도 한다. 생명을 북돋고 살리는 말이 있고,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말이 있다. 굳이 구분하자면, 전자는 선이고, 후자는 악에 속한다 하겠다.
악은 개인의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집단의 차원에서도 저질러진다. 미국의 정신 의학자인 스캇펙은 집단에 의해 저질러지는 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통찰하였다. “모든 개개인이 자신을 자기가 속한 집단의 행동에 직접 책임이 있는 자로 인식할 때까지는, 어떤 집단이라도 불가피하게 잠재적인 무양심(비양심)과 악의 상태에 빠져 있을 수 있게 된다.('거짓의 사람들')"
옛 글에는 그 사람의 언행과 태도를 헤아림으로써 군자와 소인배를 분별하는 글들이 많이 있다. ‘맹자 진심(盡心) 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선비가 마땅히 말을 해서는 안 될 때에 말한다면 이는 말함으로써 이익을 낚으려는 것이고, 말을 해야 할 때에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이익을 낚으려는 것이니, 이는 모두 담을 뚫거나 넘어가서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과 같은 종류이다.(未可以言而言, 是以言餂之也. 可以言而不言, 是以不言餂之也, 是皆穿踰之類也).” 신흠(申欽·1566~1628)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침묵하는 것은 잘못이다. 의당 침묵해야 할 자리에서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반드시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해야만 군자일 것이다(當語而嘿者非也, 當嘿語者非也, 必也當語而語,當嘿而嘿 其惟君子乎)". 조선조의 정조대왕은 이렇게 말한다. "말하지 말아야 할 때에 말하는 것은 그 죄가 작지만, 말해야 할 때에 말하지 않는 것은 그 죄가 크다.(未可以言而言者 其罪小, 可以言而不言者 其罪大)".
최근의 우리 사회는 언론자유,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실체가 모호한, 온갖 억측과 왜곡과 궤휼과 거짓된 불신의 언행들이 난무한다. 선과 악, 양심과 비양심, 옳고 그름이 뒤죽박죽이 되어, 신앙의 이름으로 때론 신념의 이름으로 때론 정의의 이름으로 때론 법 혹은 도덕의 이름으로 때론 애국의 이름으로 때론 권위의 이름으로, 뒤바뀌어 나타나기도 한다. 말이 예사로 뚜렷하게 사람을 해치는 칼이 되고 폭력이 되며, 법과 상식과 인간 됨의 도리를 무시하고 넘어서며, 심지어 생명을 파괴하기까지 한다. 남들 보다 더 많이 배우고, 남들보다 더 나은 환경과 사회적 지위와 이익을 누리는 사람들일수록, 스스로를 도덕적이고 정의롭게 여기는 사람들일수록, 감정적 호불호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여기에 적극 동조하고 있거나, 아니면 침묵으로 방조하고 있거나, 또는 상황에 따라 양비론과 양시론을 취하고 있는 형국이다.
"중립은 억압하는 자만 도와줄 뿐, 억압받는 사람에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는 죽음의 나치 수용소에서 생존한 유대계 작가이며, 1986년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Elie Wiesel, 1928~2016)의 말이다. 그 어떤 이유에서건, 선악의 유무와 관계없이, 중립에 서든, 침묵하든, 말을 하든, 투사를 하든, 도덕적 책임 전가를 하든, 타인에 대해 발하는 모든 언행과 태도는 온전히 그 사람 개인의 자유의지의 발로요, 선택이요, 인격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이성과 일말의 선한 양심이 있다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그 결과로 드러나는 악의 문제에서 능히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아니면 말고'라는 말처럼 무책임하고 사악한 말은 없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 흠결과 실수가 없는 완전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쨌든 자신이 스스로 사유할 줄 아는 지성인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이 평가든 판단이든 선택이든 투사든 책임 전가든 간에 이유 불문하고, 먼저 타인을 대하는 자신의 언행과 태도에 대해 한 번쯤은 신중하게 되돌아보고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때에 따라 침묵은 귀한 것이며, 만약 시비의 올바름을 얻지 못할 경우, 나는 아첨보다는 차라리 나무람을 쫓겠다."라는 성호 이익 선생의 말이 적어도, 머리가 둔한 졸보에 불과한, 내게만큼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202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