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람들은 서사(書史)를 약간 섭렵하면 곧 함부로 잘난 체하여 나만 옳고 남은 그르다 생각하고, 기이한 문장을 발견하면 세상에서 빼어난 학자로 여기고, 어려운 글자를 기억해내면 남보다 뛰어난 견해인 양 여기고, 우연히 세상에서 오독(誤讀) 하던 글자의 독음이라도 깨달으면 그들의 무식함을 비웃지만 자신도 오독하는 것이 무수한 줄 알지 못하고, 우연히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궁벽한 시구절이라도 찾게 되면 남들의 고루함을 조롱하지만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되는 줄 알지 못한다. 혹자는 남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여 우물우물 얼버무려 자취를 가리고, 혹자는 식견이 어리숙한 자들에게 자랑하여 과장을 일삼아 명성을 훔치는데, 이러한 무리들이 세상에 가득하다. (중략) 세상에서 관규여측(管窺蠡測)의 소견으로 함부로 타인을 논평하는 경우가 모두 이에 해당하니, 그 폐해는 결국 반드시 옥과 비슷한 돌(燕石)을 보배로 여기며 화씨(和氏)의 박옥(璞玉)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산계(山鷄, 꿩)를 귀히 여겨 봉황이 상서롭지 않다고 비방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식자의 눈으로 본다면 어찌 너무나 애석하고 크게 탄식하지 않겠는가. -윤기(尹愭 '한거필담 閒居筆談'부분)
관규여측(管窺蠡測)이란, '대나무 대롱의 좁은 구멍으로 하늘을 살피고, 전복 껍데기로 바닷물의 양을 헤아린다'라는 뜻이다. 불교의 열반경에 나오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盲人模象)' 의 우화와 그 의미가 비슷하다. 문장의 의미를 굳이 풀이하지 않더라도, 이미지로 상상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볼 문제는 '관규여측' 혹은 '맹인 모상'으로, '무릇 자신이 다 안다'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지식의 가장 큰 적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에 대한 환상이다"라는 말이 있다. 인터넷에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말이라고 떠돈다. 하지만 호킹이 한 말이라는 출처도 기록도 모두 불분명하다. 다만 지식의 환상에 대해 지적한 이 문장은 미국의 작가이자 역사가인 다니엘 부르스틴(Daniel Boorstin)이, 평소 그의 저술(『The Discoverers』, 1983)과 인터뷰에서 사용한 말이다. 그는 1984년 1월 워싱턴 포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the facts)이란, 구원자다. 선입견에 얽매여 사실을 억지로 끼워맞추지 않는 한 그렇다. 발견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의 환상이다."(The greatest obstacle to discovery is not ignorance—it is the illusion of knowledge.).
'지식의 환상'이란, 자신이 '타인보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라고 믿는 심리적 상태다. 지식의 환상은 결국 사람들을 자기 과신 혹은 자기 확신의 상태로 몰아가 새로운 것에 대한 더 이상의 배움은 필요 없다고 여기게 만든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는 곧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지식의 환상을 주제로, 2015년 미국 코넬대와 툴란대 심리학 공동 연구팀의 연구 결과는 이를 사실로 입증하였다. 특히 스스로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고 확신하고 있을 경우, 집중적으로 더 이상 해당 분야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탐구와 학습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Stav Atir, Emily Rosenzweig, and David Dunning,"When Knowledge Knows No Bounds: Self-Perceived Expertise Predicts Claims of Impossible Knowledge" 2015.)
지식의 환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행여 누군가가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것을 제시했을 때 혹은 인지했을 때,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은 곧 자신의 자존감이 무시당하거나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심리적 경향이 크다. 때문에, 쉽게 인지부조화에 빠지며,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을 바르고 온전한 방향으로 고치기보다는 오히려 논리를 강화하여, 새로운 사실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저항하거나, 그러한 것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가지거나 적대시하는 경향성을 쉽게 보인다.
사회적으로 알려진 사람이라면, 특히 대중이 그 사람의 실질과는 무관하게 어떤 형태로든 권위를 부여한 사람이라면, 자기주장과 신념이 뚜렷하고, 소신과 확신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대중들은 더 믿음이 가고 더 선호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심리적으로 사회적 보상이 따르기 때문에 개인의 마음속에 일단 자리 잡은 지식의 환상은 계속 강화될 뿐 쉽게 고치기 어렵다. 하물며 그것이 사사로운 이익이나 욕망 혹은 이해관계(利害關係)와 깊숙히 맞물려 있다면 말할 필요도 없다. 참고로 심리적 보상은 인지부조화를 더욱 강화시키는 주된 원인 특성 중의 하나다.
또 심리학 전문 용어 중에 '통제의 환상 (Illusion of control)' 이란 것도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알렌 랑거(Ellen lnger)가 연구 고찰하여 정의한 개념이다. 통제의 환상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심리적 경향, 혹은 외부 환경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믿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통제의 환상'이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통제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듯 지식의 환상과 통제의 환상은 자기 과신 혹은 왜곡된 자기 확신의 함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우리의 이해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으며, 심지어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미지(未知)의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 심지어 비록 우연히 밝혀졌다할지라도 인간의 이성적 사고 혹은 과학적 사고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어쨌든 세상사든 사람의 일이든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자세히 살피고 헤아리지 않으면 그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모르는 것이 많다할지라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별 지장은 없다. 내가 아는 것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에 문제는 없다. 단지 개인적인 상황과 형편에 따라 때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모르는 것 혹은 몰랐던 것은, 살아가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배워서 이해하고 제대로 알면 된다. 그런데 때때로 부득이하게 세상에 속고 인생에 속고 사람에게 속고 심지어 자신에게도 속는 일은, 누구나 일상으로 겪는 뼈아픈 경험이다. 심지어 우리를 속임으로써 특별한 사회적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 또는 집단들이 있다.
나름 생각하기로는 우리가 곧잘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여러 다양한 요인들이 있겠지만, 대부분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착각과 오해 내지는 맹신때문일 것이다. 무지(無知)는 학벌, 학식, 사회적 지위, 개인의 능력, 연령, 성별 등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무지(無知)는 '아는 것이 없음'를 뜻한다. '아는 것이 없음'은 곧 모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그 자체를 모르는 것, 또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 것,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 등등, 이 모두가 '아는 것이 없음' 곧 무지(無知)에 해당한다.
다행히 배움은 끝이 없고, 왕도(王道)도 없다. 인간의 정신과 사고력은 부단한 배움과 익힘을 통해 성장하고 향상된다. 그러나 무릇 '다 안다'라고 착각하는 시점부터, 마치 일정 연령에서 신체 발육의 성장판이 닫혀서 신체의 성장이 일체 멈추듯이, 정신적 발전 혹은 이성적 사고능력의 향상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 여지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의 수용 및 그에 대한 탐구와 배움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더욱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일에 집착할 뿐이다.
관규여측의 소견으로 세상과 사람과 자신을 헤아리며, 자기 과신과 확신에 가득 찬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점진적 변화의 가능성이나 개혁 가능성을 더 이상 기대하는 것은, 맹자의 이른바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찾는 부질없는 짓', 즉 '연목구어'의 어리석음과 다름없을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믿되, 진리를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을 의심하라" (「So Be It : The Chips Are Down」, 1952). 이는 앙드레 지드의 통찰이다.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는 그 어떤 것도 진실이 될 수는 없다. 비록 어떤 사람이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었다 할지라도 대부분 오류로 판명되고 있다. 근본적인 원칙은, 당신 자신을 스스로 바보로 만들지 말아야만 하고, 또 바보가 되기 가장 쉬운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리처드 파인만)
현 시대는, 오늘 ‘사실’로 알고 있던 것이 때로 내일은 '거짓'으로 밝혀지지기도 하며, 때로 선과 악이, 공정과 불공정이, 정의와 불의가, 사슴과 말(馬)이 서로의 모습이 뒤바뀌는 등, 진짜와 가짜 그리고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한 이른바, '탈진실의 시대'로 정의되는 시대다. 또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불확실성의 시대' 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배운 지식이 평생을 간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의 지식은 우리가 18살까지 습득한 편견의 총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가 과거에 습득한 지식에 안주하고 있는 한, 그러한 과거의 지식을 더욱 강화하는 확증편향에 급급해하며 집착하는 한, 우리는 급속한 세상의 변화에 더 이상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필연코 도태당하고 소외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앞에서 인용한 "발견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의 환상이다"라는 Daniel Boorstin의 문장 일부의 단어를 약간 다르게 하여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변화와 혁신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의 환상이다".
결국 변화와 혁신에서 우선순위는 '무엇을'의 인식 문제보다는 '어떻게'의 실천 문제가 선행된다. 개인의 변화와 혁신을 가로막는 지식의 환상에서 어떻게 해야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스스로 겸손해지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나름 생각한다. 그것은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지식의 바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일이다. 그래서 각자가 가진 지식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실수할 수도 있고 또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고, 동시에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 것이며, 혹 새로운 사실을 통하여 알게된 자신의 실수를 기꺼이 인정하는 것이며, 행여 잘못 알고 있었던 기존의 견해를 언제든 주저치 않고 수정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다.
이는 곧 과학적 사고(비판적사고)와 연결된다. 겸손은 호기심, 회의주의와 함께 과학적 사고 혹은 비판적 사고의 기본이 되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호기심이란, 부단한 배움의 마음가짐이다. 미처 몰랐던 새로운 지식을 기꺼이 수용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배움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회의주의는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확고한 절대 진리의 존재 가능성 여부를 의심하며, 추측이나 관념으로 섣불리 진리의 절대성을 판단하거나 단정지어 맹신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사실에 입각하여 적극 검토함으로써 궁극적인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3세기의 초대 기독교회의 교부 터툴리안(Tertulian)은 기독교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된 유명한 명제를 하나 남겼다. "나는 그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에(또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때문에) 믿는다".
속된 말로, 솔직히 내가 호기심을 갖고 파고드는 분야 이외에는, '나는 X도 모른다'. 심지어 내가 '안다' 고 생각하는 것마저도 더 구체적으로 알면 알수록, 깊이 파면 팔수록, '모른다' 는 것을 자인(自認)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무지한 나는, 내가 'X도 모른다' 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내가 모르기 때문에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또 무엇에서건 어디에서건 누구에게서든 배울 수 있으며, 또 행여 새로운 배움을 통해 내게 실수나 오류가 있다면 기꺼이 이를 인정하고, 언제든 바르게 수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실수도 곧잘 하고 또 오류도 종종 범한다. 여기에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주로 내 무지함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적어도 지식의 환상만큼은 나와 무관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2020. 6.17일 쓰고, 6.19 다시 정리하고 고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