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정문일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르헤시아 Dec 28. 2021

얼굴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렇다, 이제 시작했다. 아직은 익숙하지가 않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할 작정이다. 이를테면, 나는 여태껏 사람의 얼굴 개수가 몇 개인지 궁금해 본 적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얼굴의 수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데, 모두들 자신만의 얼굴을 여러 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하나의 얼굴을 수년 동안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얼굴은 세월의 흐름 따라 자연스레 닳아가고, 누추해지며, 주름지게 마련이다. 심지어 여행 중에 착용한 장갑처럼 늘어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소박하고 검소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살아가는 데에 그 얼굴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누가 그렇지 않다고 감히 그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궁금해지는 것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사람들이다.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그 얼굴들을 과연 어떻게 할까?... 얼굴은 얼굴일 뿐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섬뜩할 정도로 재빨리 하나씩 하나씩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 내고, 상황과 환경에 적합한 새 얼굴로 바꾼다. 처음에는 영원히 그럴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마흔 살도 채 안 돼서 이미 맨 마지막의 민낯이 드러나게 된다. 물론 그것은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경우다.  


-릴케(Rainer M. Rilke, '말테의 수기')

매거진의 이전글 이해와 오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