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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May 05. 2022

환상

프란츠 카프카는 “초조해하는 것은 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막 시단에 새로이 등장한 폴 발레리가 스승으로 우러러보던 스테판 말라르메에게 시작의 충고를 구하는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말라르메는 어떻게 답장을 썼을까요? “유일한 참된 충고자, 고독이 하는 말을 듣도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자신이 하는 말도 듣지 말라는 얘깁니다. 누구의 ‘부하’도 되어서는 안 되고, 누구의 ‘명령’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질 들뢰즈의 강력한 말이 있습니다.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라는. 현재 대부분의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적인 지식을, 그것도 위에서 강림한 것 같은 그런 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 무엇에 대해서도 재치 있는 코멘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매달립니다. 결국은 둘 다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환상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로빈슨은 해변에서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놀랍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건가? 아니, 내 발자국 인지도 모른다. 나는 우스꽝스럽게 자신의 발자국에 겁먹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 날 또 그 장소에 가봤더니 발자국은 말끔히 지워져 있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이것은 ‘혼자 본 것은 사실 본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뭔가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여러 가지 봐도 거기에 그 확실성을 공유해주는 타인이 없습니다. 그 타인이 그 확실성을 부정했다고 한다면, 중립적인 입장에 서줄 제3자가 필요해집니다. 그러나 무인도이니 그런 사람도 바랄 수 없습니다. '자기 이외의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각이 자신에 의해서만 보증된다.' 그것은 사실 지각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진 광경과 자신의 망상을 구별하는 선이 갑자기 긁혀 점선처럼 되었다가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이렇게 하여 문득 공포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공포가.      


-사사키 아타루(에세이집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송태욱 역, 자음과모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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