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완전한' '진실한' 등 일련의 형용사들의 간계를 조심하지 않은 까닭에, 젊은이들의 정신이 정체하거나 부패하는 수가 있다. 힘겨운 문제를 대면하는 데 지구력을 보일 수 없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형용사들을 미끼로 문제를 농담으로 유인해 들이는 것이다. 때로 사랑이 강조됨으로써 자기 합리화의 수단이 되고, 한 시대의 정신적 공해가 된다.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 '헤픈 신음'이나. '발작적 분노'로 전화되어 어이없게도 권력과 불평등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나무가 '되기 위해' 씨앗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된 것들은 또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 영원히 무엇이 되지 않기 위해, 끝내는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목적 때문에 생을 망쳐서는 안 된다. 가장 순수하게 아는 것이란 문제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즉 문제를 끊임없이 보살피고 키우는 것을 말한다. 너무도 당연한 것은 쉽게 잊혀진다. 삶이 그렇다. 문제는 내가 타락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잃었다는 데 있다.
-이성복 시인 잠언집, 『이성복 아포리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문학동네/2014년)